제가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스몰프레스 유연성클럽
@theflexibilityclub 에서 2026년 첫 신간, 『역사 디자인하기 - 문서와 권력을 이루는 불변의 형식들』 을 출간합니다.
tumblbug.com/immutable 프로필링크에도 달아둘게요.
작년에 서둘러 내고 싶었지만, 늦더라도 공들여 소개하는 게 이 책이 지닌 가치에 걸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쩌다 『역사 디자인하기』 를 발견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아래의 이야기로 책 소개를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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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부서(Nothing(0) Department)>를 준비하면서, 외할머니와 증조외할머니 간 정치적 긴장의 기록을 찾기 위해 할머니가 집을 비우신 틈을 타 외갓집을 온통 헤집었다. 땅 문서, 연탄 판매 장부, 탄광 양도양수계약서 등, 집을 뒤져 찾아 낸 각종 문서에서 외할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남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난민에 가까웠던 외할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외증조모는 집안에서 방귀 좀 뀌었다던데, 널부러진 문서들 어디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가사 노동과 관련된 문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어렴풋이 문서에 권력이 내재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정이 있어 폐기된 영상 작품 <CANON>을 구상할 때, 나는 작품 안에서 내 유죄와 무죄를 동시에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 관련 문서들을 위조하려 했다. 여권, 보험가입계약서, 통장, 합격통지서, 주민등록증, 부동산 계약서, 신청서, 고소장, 기차표, 변호사 수임 계약서, 지폐, 성적표, 신고접수서… 이 문서들은 (물론 위조되었더라도) 잠시나마 깜빡이는 사실의 홀로그램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문서는 내 작품 안팎으로 늘 있어 왔다. 나는 항상 문서들, 위에서 나열한 종류의 종이조각들과 더미에 늘 끌렸다. 그것들이 주는 인증, 신뢰, 책임감, 약속, 안심, 자격, 제한, 규칙, 허락, 그러니까 문서가 가진 권위에 끌렸던 걸까?
쌓인 서류의 이미지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 [갑자기 이야기가 튀지만, 이런 ‘문서 페티쉬’를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또 문서 페티쉬를 가진 사람들은 문구류를 좋아할 확률도 높다. 문구, 문방구, 스테이셔너리샵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범생이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범생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즉, 변하지 않는 상태(immutability)를 추구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의 <뷰티학 개론 - 아름다움을 찾아서>를 참고하면 좋다.)] 『역사 디자인하기』 는 이런 창작 과정 중에 발견한 책이다. 나와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 리,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문서에 권력이 깃들어 있음을 감지했지만 중요한 일을 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중심으로 각각 디자인과 한 가정의 역사가 쓰여졌음을 비판한다. 만약 가사일을 측정하고 정량화하여 문서화할 수 있다면, 집안일은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자의 일만이 아닐 수 있었을까? 남자가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됐을까?
크리스의 관점에서 ‘위조’는 디자인 실천이
된다. <CANON>을 위해 위조된, 동시에 작품을 위한 소품이었을 문서들은 얼마나 사실을 편성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은 문서가 어떤 스토리의 지속성을 추동하는가에 달려있다. 크리스가 책에서 말하듯, 권력은 문서를 만드는(디자인하는)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문서가 품고 있는 불변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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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역사 디자인하기』 라서 디자이너만을 위한 책으로 여기실 수도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힘(권력), 정치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동사무소, 공항, 경찰서, 법원, 놀이공원 키 재기 판, 병원, 은행 등의 장소에서 불편해 본 적 있거나, 쫄아본 적 있다면, 혹은 안정을 느낀 적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서더미가 자아내는 왠지 모를 섹시함 혹은 만족감을 아는 ‘문서 페티쉬’를 가졌다면, 문서의 형식이 어떻게 행정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