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이후>,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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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도 더 전 미래주의는 그게 비록 파시즘으로 귀결되었을 지라도, 역사적 시간성의 추구를 예술을 통해 선언해냈다. 하지만 2000년대 기호자본주의 - 금융자본주의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역사적-시간성을 잃어버렸으며 현재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기호자본주의-인지자본주의는 예전보다 더더욱 일상을 식민화하한다. 이 자본주의는 초기 산업자본주의의 청교도적 근면성을 상실하였으며, 이제 바로크의 잔혹성, 범죄자의 얼굴을 한다. 좌파는 이에 대해 깊게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해버린 기반 위에서 실패했다. 공장이나 일터 등 물리적 기반이 필요 없는 인지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자들은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프랙탈이 되며, 집합적 실천은 요원해진다. 비포는 이에 대하여 대안으로 비 일시적 공동체를 제안한다. 이는 일종의 커먼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멸 속에서 좌파의 멜랑콜리는 지속되지만, 비포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좌파, 지식인의 의무라고 말한다
<포에버리즘>, 그래프턴 태너, 워크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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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끝나지 않고 영원히 동시대로서 계속된다. 자본주의는 파국적 효과를 가진 노스텔지어를 경계했지만, 이내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상품화 하는 방식으로 영원주의를 개발해냈다. 정치, 문화, 예술 모두 영원주의라는 이름 아래 과거의 영광을 활용하며 지금을 지속 시킨다.
실재의 귀환
할 포스터
경성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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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미술의 계보를 좇는 책, 잠짓 아무 것이나 해도 된다는 현대미술의 통념과 다르게 미국 작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작업적 근거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네오 아방가르드는 피터 브뤼거가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전략을 취하면서 자본주의적 논리를 받아들인 열화판이 아니라, 오히려 네오 아방가르드에 의해서 다다와 같은 아방가르드들이 새롭게 이해될 수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이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적이며, 모더니즘의 이성주의는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에 의해 붕괴되었고 미니멀리즘은 일종의 주체/객체적 전환을 불러 오며 포스트 모더니즘과 결합되었다고 이해했다. 한편, 더 이상 리얼리즘(프롤레트 쿨트)와 같은 방식으로 실재는 재현될 수 없기에, 동시대 미술에서는 라캉적 외상적 의미로서 실재는 귀환한다. 그 외에도 네오지오, 차용미술 ,팝아트, 민족지적 예술작업 등을 폭 넓게 다룬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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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오늘날의 보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흥미롭고,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소설적으로 직조 된다.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최소한의 코뮤니즘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고, 글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이용해 넓게 비약한다. 시각예술은 이미지에 구속되는 한편, 글이라는 재료는 자유롭게 느껴진다.
[요약]
정동이 주목 받은 이유는 이성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의 논의처럼 이성은 인간의 계몽을 위한 빛으로 여겨졌으며 유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과를 우리는 세계대전으로 확인했다. 한편 달라진 인지자본주의 조건과 감정의 경제학(새로운 자본의 축적은 감정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라는 것도 정동의 재발견을 요청하게 된 흐름이었다.
정동 이론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1) 과학, 기술, 신경 이론과 연접한 ‘초-미시적 신경이론’으로 추상적/문화적/사회적인 표현으로 여겨져온 감정이 어떻게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심이 있다. (2) ‘감정과 문화학의 사회학’은 자본주의 근대성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담론화 과정을 파해치고 역사적 국면마다 감정분석을 통해 새로운 구성을 모색한다. (3) 스피노자와 들뢰즈, 마수미와 관련된 ‘그 자체로서 힘과 강도의 문제인 정동’ 기존에 정동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이성보다 열악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철학적, 미적, 윤리적 입장으로 다시 읽힌다.
정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지 않으며 이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권력의 작동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최근 인플레이션은 실제적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느낌들로 유발된다. 국가 권력은 ‘소프트 파워’의 예시처럼 더 이상 감정-정동 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등한 감정(고양, 고취 등)과 열등한 감정(수치, 우울 등)을 위계화하여 관리한다.
정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는 정동이 감정과는 다르게 신체와 마음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이 의미화, 언어화되기 이전의 것(대뇌피질의 자극 실험)이라고 주장하며, 정동이 가진 자율성을 주장한다. 정서는 정동을 포획하고 고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형식이다. 반면 정동은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영토에서 출현한다. 정동은 이 때문에 미학적, 윤리적 정치학이나 의미화 과정이나 주체성 이론, 지식의 범위 밖에서 다루어진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로 주체의 상실을 주장했고, 프레드릭 제임슨은 반고흐의 구두와 워홀의 구두를 비교하며 정동의 소멸을 등가시키기까지 했다.(즉, 그러므로 감정을 느낄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세계는 포섭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정동은 주체의 상실 이후에도 남는다.(마수미에 따르면 주체를 벗어난 자율적으로 존재하니까) 이에 대한 알레고리들이 <블레이드>러너의 인공지능의 눈물, <박쥐>의 구두. 정동은 감정의 사물이 아니라 탈-주체일 수 있고, 정동 그 자체의 자율성이 가진 사물이 될 수 있다. <박쥐>의 구두는 숭고함의 정동 이미지인데, 이 정동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세계의 끊임 없는 확장에 직면해서 자아의 범위를 지각하도록 하며 타자와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즉, 미학적 정동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자율성이 부정 당할지라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
정동이 지닌 힘은 예술과 미학의 정치학과 관련되며 확장된다. 예술의 힘은 결국 정동의 힘에 대한 질문과 닿아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재현이나 재현의 위기로 보는 과거의 관점과 작별해야 한다. 들뢰즈는 예술을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으로 나누었고, 예술은 본질적으로 비가시적 세계를 현실화하는 힘이다.(잠재태를 현실에 불러오는 것이다) 미적 사건들은 우리의 기존 지각과 경험을 탈영토화하고 우리를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든다. 또한 정동 이미지는 역사적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보편적 정서를 불어 일으킨다. 일종의 질이자 권력으로서 정동 이미지는 의미화 과정에 사로잡혀 현실화되고 탈영토화 되지 않는다는점에서 정동의 미학적, 윤리적 정치학을 담지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순간 주체와 만나며 수 많은 접속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다른 대표적인 예시는 색채로, 우리는 노란 리본을 보면서 세월호를 떠올린다. 이는 색채 이미지의 정동적 효과다. 이미지를 통해 현실은 미디어의 세계로 다시 현실로 이동하며 이미지의 정치학을 구성해낸다.
감각적인 문제라고 할지라도 정동의 출현은 개인과 사회를 연결지으면서 감각, 역사, 이데올로기의 중층적 관계를 만들어내고 정치학과 미학 사이의 소통을 더 확장한다.
[요약]
필자는 최근 뇌과학의 발견 성과(다마지오), 자연과학이 사회과학으로 편입(루만)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발견들은 ‘마음의 생물학’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체제 비판과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사회를 해석하면 이미 다 그자체로 구성되어 있어 자기조정적 기능에 의해 변화의 발생은 불가능하고 현 사회체제와 권력체제는 상승과 하강, 번영과 몰락을 거듭하면서도 유지한다. 생물학과 다른 설명인 시스템 이론(파슨즈, 루만)마저도 자기언급적으로 시스템의 변화 불가능성만 제시할 뿐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이런 자기충족적, 자기언급적 시스템 이론들에 반대하기 위하여 오토포이에시스적 시스템 이론을 강조한다.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은 자기 구성, 자기 창발적인 시스템이다. 현실에서도 자기보존을 하려는 사람들과 다르게 사회운동으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마음의 생물학은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마음이 생성적, 창발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마음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변증법적 구조에서 체제를 유지하는 것(파슨즈, 루만, 다마지오)이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기도했던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푸코다. 푸코는 권력은 본질이 아니라 작동으로 파악했으며, 푸코에게 비판은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회로를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원인이 시스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작동이 원인이므로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는 마음이 ‘시장화’된 상태이며 현재의 시스템 구조는 마음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회로를 새롭게 창출해낼 수 없다. 그 결과가 사회에서 금융자본의 이해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인적 재난과 참사(용산재개발, 부산 해운대 화재 등)이다. 그럼에도 기존의 운동은 새롭게 생성적, 창발적이기보다는(마음의 새로운 회로를 만들기 보다는) 기존의 피해와 억압을 강조하는 방식이 된다. 이 경우에는 마음의 생물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조정 시스템이 작동할 뿐이며,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마음의 정치학’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운동 즉 사회가 해야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문화정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서는 이를 훈련하고 자본주의의 논리를 탈피하는 코뮌을 형성해야 한다.
[요약]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단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목표는 이미 성취되었다는 ‘오해’ 혹은 의도된 ‘속단’을 바탕으로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흐름을 일컫는 비평용어다. 영화는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1990년대 이후 소비주체로 등장한 여성이 문화현실-문화상품과 맺고 있는 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특정한 경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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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영화에는 기존과는 다른 한국-여성-캐릭터를 보여주었다.(<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 등> 이는 이 시기 여성이 가부장적 질서, 가정을 위해 소비하는 주체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소비주체로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사적 가부장제에서 공적 가부장제로) 그럼에도 공적 가부장제는 순식간에 여성을 사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성이었다. 90년대의 영화는 늘 모성애에 대한 강조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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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는 감쪽 같이 여성 캐릭터들이 사라지는데 이는 IMF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가족 부양 능력을 위축시키는 대량 실업이 벌어지면서 남성 가장의 권위 상실감에 따른 ‘남성 위기’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IMF가 남성들에게만 고통의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IMF 이후 여성의 사회 활동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특히 결혼한 여성은 정리 해고 1순위에 올려났고 공적영역에서 사적영역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좇아내진 뒤에도 다시 가사,육아 등 재노동에만 전념할 수 없었고, 신자유주의화된 경제의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일용직이나 계약직, 비정규직 등 더 열악하고 불안정해진 고용과 노동조건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보수주의는 강한 여성 어머니로 여성의 상징성을 다시 만들었고 이는 보수주의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여성의 자아실현 욕구는 이기적인 것으로 비판 받았다. IMF 이후 한국사회는 사회 재난/참사를 상징조작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문화의 시대’였다. 그런데 그 문화는 명백하게 젠더화 되어 있었고 그래서 개인화되어 있었다. 위기와 재난은 남녀 성대결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렸다. 이제 가부장제는 남성의 지배를 견고히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성별화시킴으로써 거대한 구조 자체를 가리는 방식으로 자본과 국가에 착종된다.(여성 갈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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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2005)와 <써니>(2011)는 2000년대 여성주체의 다른 등장을 증거하는 영화들이다. <왕의 남자>는 야오이 코드를 심어 여성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써니>는 ‘바람직하지 않은 외모의 여성’이 특정한 계기를 바탕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변신을 통해 일과 사랑을 성취하는 ‘메이크 오버’ 필름의 변형이다. 영화는 남성 대신 어린 시절 간직하던 꿈으로 치환되었지만, 이는 ‘스스로 돌보며,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기업화’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새로운 여성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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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사이버 공간이 열린 이후 영 페미들은 여성혐오의 질서가 그대로 재현된 사이버 공간에 대응하기 위해 페미니즘 사이트를 만들었지만, 여성들의 보편적 지지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여성시대와 같은 카페들에서는 페미니즘의 수혜 안에서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차별과 억압의 단면들을 여성 젠더로서 포착하고 저항하고자 했지만, 신자유주의적 가부장 체제를 내면화한 특정한 실천을 통해 자신이 어떤 보상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체제 유지에 어떻게 복무하는지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못했다. 이가 여성이 아닌 다른 소수자 주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결국 ‘페미니즘 리부트’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판타지의 실패가 가져온 아주 현실적인 조건으로부터 등장한 운동이었다. 이들의 중요한 의제가 ‘동일노동 노동일금’에 집중되어 있고 ‘공적 영역의 재편’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은 이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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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분리된 채로 공허하게 등장하는 페미니즘이란 없다.(나아가 이건 다른 사상도) 이 때문에 시대의 한계를 당대 페미니즘의 한계로 내재화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 한계를 갱신하는 상상력이자 실천의 에너지였는 점을 오늘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요약]
근래 생태주의가 다른 담론들과 함께 새로운 사회의 원리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담론의 논의 이전에 앞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운동의 연대를 주장할 때, 각각의 ‘차이’들이 생태의 이름으로 지워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주장은 남성들의 권력-지식-욕망의 네트워크에 의해 기동되지 않는가? 가부장적 사회구성 문제는 현단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 사회 즉, 생태론을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곳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냥꾼 / 채집자의 메타포는 사냥꾼에게는 제국주의적 정당화를 만들어주었고 여성에게는 자급적 생산 즉, 재생산노동의 굴레에 갇히게 했다. 이러한 자급 노동은 실제로는 체제를 떠받치는 토대이나, 재생산 노동으로서 가치가 절하되고 있다. 여성은 사람 체제를 자원으로 삼아 생존 혹은 자급적 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노동을 전유하는 초과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생태사회가 새로운 사회의 원리라면 여성이 소모되는 감각을 느끼지 않아야할 것이다.
서로 분리된채로 남아 본의 아니게 자본-국가-민족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빚지 않으려면 어떤식으로든 소통해야할 것이다. 사실 이 소통행위 자체가 매우 문화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해야할 것이 있는데, 먼저 가정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대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성은 삶 노동에 참여하여야 하며, 여기서 남성 스스로 생명을 키우고 보존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생태론의 기초 능력인) 공통감각과 생명존중의식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상생적인 상부상조의 감각을 일상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감각을 바탕으로 성, 세대, 교육환경별로 나뉘어져 있는 가족들과의 소통 능력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소통구조에 개입하여야 하며, 시간으로서 해방되어야 한다. 가장 기초적인 가부장적 질서 - 성별 분업노동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생태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다.
[성찰]
성인이 되어서 가족의 부채를 내가 떠맡게 되며 엄마에 대해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심리상담에서 트라우마 작업을 하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가진 다양한 면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문화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에 대해 잘못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엄마가 자식에게 가한 윤리적인 문제와 내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엄마에게 대하는 태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나중에 가족을 가지게 된다면 일상에서의 일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기초라는 것을 생각하겠다. 그리고 일상에서 여러 (글에서의 표현에 따르면) 자급 노동에 대한 숭고함들을 기억해보겠다.
[요약]
최근 대선 국면에서 합리적 보수에 대한 좌파의 열망이 뜨겁다. 이는 과거 한국 사회가 기득권적 체제 공모로 유지 되었고 합리적인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보수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이념 없는 이데올로기다. 보수주의자의 근원으로 평가받는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에 잘 나타나있으며, 헌팅턴의 주장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상황적인 개념(개혁적 요구의 분출과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입장)이 제일 잘 설명해준다.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된 것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면서 부터이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이성에 대한 불신’을 공유했다. 이후 보수주의는 형이상학적 소망, 실체적 내용, 유토피아가 생겼다. 이후 레이건과 대처는 문화정치를 통해 투쟁을 내세우며 이데올로기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가 제기된 배경으로는 김대중 집권 이후, 보수주의의 이념화가 필요해지면서부터이다. 과거 한국은 기득권 동맹세력의 초장기 집권으로 해게모니적 기획 자체가 필요가 없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며 실체적 내용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지켜야할 전통(수구주의는 원래 청산해야만할 과제가 산적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으나) 발굴하고자 했고 이가 유교자본주의론과 식민지근대론이었다. 둘다 전통적 가치를 주장하면서도 현 체제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있다.
결국 합리적 보수주의란, 이데올로기화하지 않은 - 이성적 합리성에 기초한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보수주의는 실용적이다. 그런데 이가 요청되는 배경은 늘 개혁의 요구가 분출될 때 뿐이다. 그렇다면 좌파의 과제는 이 분출된 욕망을 급진화하는 것이다.
[성찰]
(1) 수구주의가 키메라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저항이 그만큼 어렵고 촘촘한 이해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먼저 해야할 것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분석해야하는 것일테다.
(2) 역사적으로 개혁의 힘은 왜 퇴보할까? 파시즘적 기제와 관련이 있다. 물질적 조건의 몰락은 하층 계급에게 분노와 저항을 일으키다. 파시즘은 이를 상징주의적 조작(문화정치)를 이행한다. 그렇다면 촘촘히 키메라로 구성된 보수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요약]
신경숙의 표절은 다시 문학권력 논쟁을 일으켰다. 이를 차이와 반복으로 살펴볼 필요거 있다.
반복되었던 것은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이 상실되거나 다른 틀로 흡수되었다는 것(대중독자 취향 소비가 문제는 아니다)과 과거와 달리 젊은 작가, 독자들이 문학의 특권화에 저항하고자 했다는 것.
기존 주류 문학가들은 한편으로는 운동으로서의 문학(대문학주의)과 문학의 자율성(소문학주의)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체제에 영합한다. 이가 차세대 에이스 발굴, 장편 대망론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토대 아래서 문학은 대중문화에서 고사종이 되었고, K-문학이라는 제국주의적, 가부장적 욕망은 이제 조롱의 기표가 되었다.
문학장의 형질개선을 위해서 비평을 복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문학은 하나의 권력이 독점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오늘날 더 나은 비평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상호 취향을 나누고 논쟁하면서 공동체를 위한 취향을 공통감각으로 라이브러리에 등록하는 일이다.
이제 문학은 기존에 문학성/대중성을 이분시키며, 운동을 위해 ‘독자중심론’을 주장하면서도 기실은 ‘독자바보론’이었다는 것에 탈피해 적극적으로 독자에게 영합해야 한다. 이미 독자들은 다중으로써 정치적, 윤리적 감각들 가지고 있고 이가 문학 소비의 준거가 되었다.(다중의 시대니까)
[성찰]
(1) 전반적으로 동의, 비평의 종말은 한편으로는 비판이론의 개입이 불가능해진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의 감각을 공동체의 저장소에 등록하는 일이 예술과 비평이 해야하는 일이다.
(2) 역사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면 한편으로는 주체성과 일상에서 괴리된다. 수직과 수평을 교차하면서도 거기가 매개되는 지점에는 나의 경험과 감각, 대중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
[요약]
북한 연구는 기존에 주로 체제 연구자 발화자의 인터뷰에 근거한 기록들 중심으로 연구해왔다. 하지만 문화연구의 입장에서는 일상문화(생활문화)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 문화연구는 기존의 문화연구가 지향하는 바인 ㄱ. 특정 사회의 구조와 역사를 통해 그 사회의 문화를 분석하는 일, ㄴ. 사회 체제 내에서 계층, 세대, 젠더, 지역 등 불균등하게 구분된 영역들에 접근하는 일 , ㄷ.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ㄹ 일상생활이 어떻게 구성되고 문화가 어떻게 그 사회의 주체를 형성하는가?와 같은 방법을 취한다.
북한 문화연구는 주로 텍스트를 중심으로 ‘읽어내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현장에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 문화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북한 언어에 대한 낯섬, 정치/사회/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도 어려움의 원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남한의 연구를 읽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지적교류의 가능성이 닫힌 것은 아니다.
비판적 문화연구는 곧 남한의 문화를 상대화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어떤 체제든 민중의 삶은 일상성을 지니며 체제의 바깥에 있다.
문화연구가 체제 내부에서 체제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할 때, 남북의 문화연구는 동일한 목표를 지닌다.
[정리]
(1)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 모나카(적도 기니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16년간 생활했고, 서울과 뉴욕에서도 생활한 흑인)가 전하는 이야기 체제의 눈으로 보면 다른 체제의 삶에서 사는 것이 비루해보일 수 있지만, 민중의 눈으로 보면 모두들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희생되어야 할 자유가 있듯이, 승자독식의 시장자본주의 안에서도 자유는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 모든 행위가 달러로 환산), 북한사회를 기록하고 있기에 독특한 문화연구 텍스트
(2) 북한 일상에 대한 연구는 북한 방문기, 북한이탈주민들의 인터뷰만으로 가능하기에 한계가 있다. 경험주의적 증언이 위주다보니 조심스러운 공식적 기록, 탐사보도의 외양을 띤 모험주의적 접근, 체제 비판적인 북한 이탈주민의 증언 위주로 중심을 이루었다. 이 접근을 벗어나려면 북한연구에서 북한 문화연구로의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기존에는 사회문화적 접근은 주로 예술을 통해 이루어졌고 변방의 것이었다.
(3) 북한 문화연구는 학술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프로젝트, 북한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상 연구, 대중연구, 욕망과 이데올로기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의 정치경제를 중심으로 한 체제 연구를 넘어 북한 민중의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재구성하고 북한문화가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북한 문화연구의 과제,
(4) 그런데 남과 북이라는 특수 관계로 인해 남한 연구자에게 북한은 ‘해석적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북한 연구는 북한에서 생산된 텍스트를 남한 연구자가 직접 보고 분석하는 연구 방법으로 진행된다.
[요약]
페미니즘과 촛불항쟁은 87년 체제의 변화가 필요함을 증거하는 봉기이다. 이 두 봉기는 자유주의 세력의 정권교체로 등치될 수 없다. 포퓰리즘이 비판 받고 있지만, 포퓰리즘은 사실 대중의 열망의 표현이다. 포퓰리즘 속에서 어떤 대중의 열망이 있는지를 포착하고, 다기한 주체들을 등가사슬로 엮어 새로운 정체성과 정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대중주의는 지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만, 지금의 조건에서는 그 누구도 지성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다. 이는 지식인 계층의 타락에 의한 바가 크다.
[정리]
(1) 페미니즘과 촛불항쟁은 민주주의 이후 민주주의의 요청을 알리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두 봉기는 ‘혁명’으로는 완수되지 않은 채 조금 어중간한 상태에서 민주주의 열차의 축을 굴린다.
(2) 촛불항쟁은 혁명의 급진성을 갖지는 못했지만 정권교체보다는 강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적폐청산과 민주개혁의 요구) - 보수의 궤멸, 노조가입률 증가,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등 새로운 주체의 등장. 하지만 촛불은 재벌, 강남 기득권, 조중동, 종교권력, 사학재단 등으로 이뤄진 지배동맹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촛불이 ‘체제 자체에’ 문제제기 하는 힘은 약했고, 촛불의 정치는 대안적 정치세력을 스스로 조직하거나 기존 진보정치 세력을 재구성, 재충전하는 힘은 되지 못했다.
(3) 페미니즘은 전례 없는 대중적 기반을 바탕으로 단호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혜화역 시위 등은 가히 혁명적 의미를 지니며 상당수 한국 남성들이 충격을 받고, 생각과 행동 방식을 고치고 있다. 그러나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도 꽤 강력하다. 그리고 페미니즘 내부의 한계는 운동의 ‘피해자’화가 신자유주의와 관련을 맺었으며 한국사회 전반의 약자혐오 문화와 언어 인플레이션, 자극적인 언설이 바탕이 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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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7년 체제는 독재세력과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민주체제이다. ‘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개헌을 하면 ‘새로운 체제’가 수립된다는 것은 안일한 진단이며, 87년 체제와 ‘87년형 민주주의’ 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5) 민주 대 반민주의 표상은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악순환을 만들었다. 이는 언제나 ‘다음에’라는 ‘시기상조론’과 ‘가만히 있으라’는 식의 비판적 지지론을 횡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건 자유주의 세력의 장기 전략이자, 되풀이 되어온 구체적인 동원의 전술이다.
(6) ‘87년 체제’와 ‘97년 체제‘(IMF 경제 위기)는 중첩된다.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은 재벌과 기득권동맹의 중심의 경제질서/축적 체제와 대다수 민중이 처한 현실로 재해석, 재배치 되어야 한다.
(7)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전선은 교차적이고 다차원적이다. 하나로 일별 될 수 없다. 동원된 기표가 아니라 ‘분할’로 상징된다. 세대 단절이나 젠더 대립, 노동계급의 분할… 계급 모순이나 젠더 모순, 생태위기 같은 다른 모순과 연관되어 있지만, 다른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불거진 성소수자, 여성주의 이슈와 다른 진보 분파 사이의 갈등이 항존하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8) 샹탈 무페는 ‘급진 민주주의’의 구성에서 있어 ‘민주적 등가성의 원칙을 통해 접합된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라 하면서도 ‘차이를 제거하지 않’고 ‘민주적 등가의 원칙을 중심으로 접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체성들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 - 이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접합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수렴될 수 있다. (불화는 불소통이 아니다) / 반대는 이미 존재한다. 이명박근혜 시절 신자유주의적 ‘치안정치’와 낡은 ‘냉전정치’의 조합
(9) 문제는 대중정치에서 ’진보‘와 소수자 정치가 절합, 연대하기 위한 범례나 방책이 불충분 하다는데 있다. 기존에는 갈등과 공존보다는 배제와 적대를 주로 작동시켜 왔다. 자유주의에서는 정권 교체를 위한 시급한 동원으로 페미니즘에서는 피해자와 정체성 정치의 한계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