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flat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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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리베트의 <북쪽에 있는 다리> 속 파스칼 오지에의 얼굴. 리베트가 세계를 다루는 시선이 좋다. <파리는 우리의 것>의 불안과 <아웃 원>의 붕괴를 지나 <북쪽에 있는 다리>. 한 번, 두 번, 세 번. 사고, 우연, 운명! 리베트의 영화들에는 리허설을 하는 자들과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르는 자들이 등장한다. 세계를 감지하고 이해하려는 모든 발걸음은 무위로 돌아간다. 아웃 원에서의 장 피에르 레오는 과장된 몸짓으로 모든 연결점을 찾기 위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줄리엣 베르토는 역할 놀이처럼 수행한다. 그리고 파스칼 오지에! 이미 무너져 있는, 폐허가 된 세계에 도착했다. 세르주 다네는 이 영화를 프랑스의 첫 80년대 영화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파스칼 오지에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의 가라데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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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s ago
몇 가지의 꿈과 허세, 중얼거림에 목을 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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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days ago
1978년 2월 카이에 뒤 시네마 285호 세르주 다네의 글. "그래서, 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새로운 영화다. 신화 해체도 아니고(무대 뒤편은 쇼의 부끄러운 진실을 말해주는데, 그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Tout va bien』), 재신화화도 아니다(꿈의 공장의 무대 뒤편은 그곳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La Nuit américaine』). 광고용 포장도 아니며(창작의 주방은 만들어진 물건들을 미리 사랑하게 만든다 – 『Repérages』), 또한 미국 뮤지컬에서처럼 “연극과 삶”, “도시와 무대”의 상호 오염도 아니다. 비에트에게 있어 연극은 삶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등호도, 심지어 부정된 등호도 없다). 연극은 삶과 같으며, 삶과 완전히 얽혀 있고, 삶을 변형시키지 않으며,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첫 번째 함정: 문화계의 불쌍한 자들, 소외된 자들(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우월감 섞인 선의를 내포하는 역겨운 단어)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가난한 연극이 부유한 연극만큼 훌륭하다는 명분으로 훔치는 것,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Le Théâtre des Matières』에서, 헤르만의 공연이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그는 천재인가? 아니면 형편없는가?)" "‘좋은 관객’(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이 점은 나중에)이란 ‘지는 자가 이기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그가 잃는 것: 일반적인 생각들, 도그마, 편견, 요컨대 이데올로기. 그가 얻는 것: 예리한 지각력: 보고, 듣고, 나아가 식별하고, 인식하고, 추론하는 능력. 그렇다면 ‘좋은 허구’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날의 허구들을 그토록 허약하고 서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욕망이 관객 쪽으로 넘어가 버려, 등장인물들에게는 그 욕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Le Théâtre des matières』에서 각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비에트의 영화가 그가 존경하는 그 ‘옛날의 좋은 영화들’ ’와 닮아 있는 점은, ‘큰 타자’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터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말한다. 그들이 욕망의 본질에 대해 착각한다고 해서, 적어도 자동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 이야기할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대타자(le Grand Autre)에 중점을 두는 것’의 실체다. 현대 영화의 위대한 승리(더 이상 등장인물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에는 그 이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배우와 점점 더 동일시하게 된다. 그들의 히스테리(“바르트는 말한다. ‘이미지란 내가 배제된 대상이다’”) 는 더 이상 허구의 흐름이나 허구가 엮어내는 육체에서 영양분을 얻지 않고, 불안으로 물들기 쉬운, 갑자기 대문자 A를 얻게 된 작가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영양분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은 <Le Théâtre des matières>의 각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비에트는 히스테리적인 극단이 마에스트로(헤르만)의 추정되는 욕망에 복종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단, 헤르만은 다소 특별한 마에스트로이며, 분석가에 더 가깝다. 타인들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것들—그들의 다이아몬드, 가구, 사랑, 물질들—에서 출발하는 존재다." "영화의 각 요소는 오직 그 영화만의 고유한 프로그램이다. 이름 하나도 프로그램이다: 도로테는 차가 자신을 졸리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레 테아트르 데 마테르’는 헤르만을 두 번이나 인터뷰한 그 바보의 입에서 “엠마 티에르의 극장”이기도 하다. 영화 구상에서 말장난의 역할에 관해, 비에트와의 인터뷰(카이에 277호)를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서 영화 속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두 번째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실행하는 것,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것,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것, 계약을 존중하는 것이다." "『Le Théâtre des matières』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은, 단어가 부르는 사물들의 유령이다. 사물들은 언어를 점령하기 위해 언어로 되돌아오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점령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데, 어떤 단어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 장면은 광대극적이거나 추악한, 신체 언어의 장면이자 신체화된 언어, 신체로 변장한 언어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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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nth ago
생각하고 생각하고 돌아보고 생각하고 뒤로 갔다가. 왜 와인은 어떻게 따르든 병을 타고 무조건 흐르는 것일까. 그만! 영속적인 것에 대한 상상을 하고, 이내 그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 잠에 들거나 꿈을 꾸거나, 그것은 가끔 뒤집혀서 다리가 달리고 목이 나온 채 비명을 지르며 상하좌우의 모든 곳으로, 점에서 점으로 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관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라고 답한다. 발코니와 농구공. 값이 너무나 싼 죽음. 여러 번. 이미지마저 앗아간다. 난 더 이상 책을 피지 않기로 하고 구토를 줄이기로 하며 토사물이 묻은 입술을 게걸스레 닦은 채 변기물을 내린다. 악! 만에 하나 당신 기적처럼 부활하여도, 당신의 죽음 의심하는 자 없을 것이다. 시계탑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파먹으며 살면 좋으려나? 감나무인줄 알고, 자꾸만 흔들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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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nths ago
정지 상태의 필립 가렐. 가렐이 입을 열면 모두가 거짓말쟁이 혹은 위선자가 된다. 지하철을 타고 지나서, 한참을 걸어서. 저녁 즈음 어딘가에 도착한다. 별을 따라 숲으로, 어떤 숲으로, 아주 작은 집으로. 아침에 그녀는 나가서 나무를 베어오고 그는 카트를 가져온다. 땅을 파기 시작한다. 당신은 영화에서 연기해야한다. 밤은 그리 강하지 않다. 규율이 필요하다. 고개를 돌리니 당신은 자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니 당신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곳에 내가 있었고 그곳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절망이 이미지를 이긴다. 나는 스스로 추방되었다. 당신에게 바치는 로열티가 내 영혼의 유일한 움직임이다. 영원에 잠식된다. 꿈에 당신의 영화에 나왔어. 나는 손에 불꽃을 쥐고 있었어. 이거봐. 내년까지 불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아. 사랑은 죽은 시간을 세어… 사랑은 죽은 시간을 세어… 우리가 그 유리창을 스무 번, 오십 번, 백 번 닦아도.. 몇가지의 어색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왜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으며 무엇에 그리도 몸을 떨까? 몇 가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지나갈 도망치는 이미지. 그리고선 당신은 말한다.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어. 할말이 없어. 1-2 / 폭로자 (Le Révélateur, 1968) 3-4 / 처녀의 침대 (Le Lit de la vierge, 1969) 5-6 / 내부의 상처 (La Cicatrice intérieure, 1972) 7-8 / 비밀의 아이 (L’Enfant secret, 1982) 9-10 / 밤에는 자유 (Liberté, la nuit, 1984) 11-12 / 그녀는 햇빛 아래서 그 많은 시간을 보냈다 (Elle a passé tant d‘heures sous les sunlight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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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알랭 로브그리예가 탈락이 확정된 이미지들을 구원한다! 로브그리예의 장편 2개 <에덴과 그 이후>와 <N은 주사위를 던졌다>는 각각 1970년과 1971년, 1년 사이의 간격을 두고 발표되었다. 그 중 1971년에 나온 <N은 주사위를 던졌다>는 <에덴과 그 이후>의 동일 촬영본을 기반으로 같은 장면들의 컷을 무작위로 뒤죽박죽 섞어 재배열해 인과를 박살내고 삭제된 컷들을 사이 사이 집어 넣어 완성되었다. 뒤라스가 본인의 영화 <인디아 송>의 사운드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이미지만 바꾼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는 감독보다는 문학 사조 ‘누보 로망’을 이끈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반소설‘ 이라 불릴만큼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구성 방식은 그의 영화에도 이어져 왔다. 이전에 나는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의 각본가로 처음 그를 접해 그의 영화 2개를 보았었는데, <유럽횡단특급> 에서는 영화 매체 특성을 잡고 장난을 치며 <거짓말하는 남자> 에서는 단일 화자를 축으로 삼아 진술의 끝없는 번복을 보여주며 거짓을 통한 거대한 진실(2차대전의 집단적 상흔)에 가닿는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후 더 급진성을 띄어 이야기의 성립 조건 자체를 붕괴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1970년작 <에덴과 그 이후>에선 허무와 환락에 빠진 대학생들이 에덴이라는 카페에 방문한 의문의 남자를 통해 환각적인 게임을 하는데, 주인공이 환상을 체험하며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여기서 주인공은 환상의 주체로써, 관객은 목격자로써 이미지의 뒤에 환상-폭력-정치적 은유가 기어코 한 덩어리로 엉켜붙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후 <N은 주사위를 던졌다> 에서는 이미지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동일한 이미지와 시퀀스, 배우들이 나왔음에도 컷 순서를 바꿔 놓고 이미지와 사운드를 불일치시켜 연속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내러티브를 위해 복무하지 않던 이미지들은 이 영화에서 완전한 부활을 맞이하며 (전 영화에서 삭제되었던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시점샷 등등) 인물은 원인 없는 폭력과 설명되지 않는 소품, 종결되지 않는 움직임 사이에서 고정된 좌표 없이 표류하게 된다. “주사위를 굴려라. tv에서 보는 이런 이야기들, 그렇게 논리적, 연속적이고 안심되는 것들은 오직 당신을 잠들게 하기 위함이다. 형사물은 수사 과정의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놓고 마지막엔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살균되어 안전하지만 맛없는 음식처럼. 현실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경찰과 변호사, 심리학자들의 구축을 무너뜨리는 것들. 내 시선을 끄는 것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문맥에서 벗어난 말들, 멈춰버린 동작들, 뜬금없이 포착된 이미지들, 우연처럼 보이는 근접성, 내 설명을 거부하는 모든것들. 그는 어디에나 있다. 그는 경찰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며..” 주사위의 우연성! 영화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나레이터를 달았다. 이 나레이터란 <에덴과 그 이후>의 주인공 무리 속 남자 조연인데, 본인을 N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주사위를 들고 나와 영화와 편집 자체를 게임으로 만들며 내러티브 권력을 조롱하기도 한다. 다소 오만하고 허세스러운 교조적 나레이팅이 이 영화의 스타일과 썩 어울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의 형식 실험은 볼때마다 내게 참 유희적인 시간이다. “tv 쇼 퀴즈는 바보같다. 세탁기나 주는 것이다. tv 화면을 바라보던 그 얼굴은 여전히 가능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 골목과 제스처, 말과 얼굴의 미로를 헤매며.. 그러나 이미 얼굴들은 섞이고 말은 사라진다. 그렇게 열렬히, 그렇게 열정적으로 엮인 여정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곳으로 이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은 다시 갈라지고 되돌아가고 뒤섞이고 같은 지점을 다시 지나간다. 그리고 여기저기 스쳐 지나가던 얼굴은 다시 텅 빈 모습으로 돌아가고, 도시는 무의미함으로, 풍경들은 평평함으로 돌아간다. 그저 게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누가 하고 있었을까? 나는 주사위를 테이블 위에, 빨간 펠트 한가운데, 내 앞에 놓았다. 세개의 여섯 면을 가진 우연은 그 자체의 법칙을 지닌다. 그들은 말한다. 게임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습니다. 게임을 만드는건 플레이어입니다. 그리고 그 플레이어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훔쳐보는 이미지들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본질적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부여하기로 선택한 것외로는. 안심의 질서든, 절망의 질서든. 그것을 만드는 것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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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스포츠, 통계로부터 도망 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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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장 다니엘 폴레의 <너는 로빈슨을 상상한다>. 카메라가 패닝하면 당신은 눈을 스스로 묶는다. 같은 장면이 다시, 같은 이미지들이 지속되며 다르게 되돌아온다. 당신은 서양 세계의 방랑하는 영웅이 된 꿈을 꾸고 고문이나 금기된 친밀함을 상상한다. 동시에 우화가 되돌아온다. 은유는 유령처럼 살아있는 자들을 괴롭히며 초대하듯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서남북,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섬 하나면 과연 충분할까? 언어마저 재건할 수는 없다. 당신은 무죄가 아니다. 그리고 고통 너머 당신이 끝내 도달하지 못할 곳 있다. 그것들은 교차한다. 체스 게임처럼, 여왕은 당신의 폰을 잡아먹는다. 항상. 모르겠다. 카드 한 벌, 부채의 펄럭임, 컵, 지팡이, 검, 왕, 여왕, 반대편, 반쯤 감긴 눈으로 표정을 읽는다. 그는 웃지 않는다. 거대한 그의 손, 그리고 그의 반지, 달빛 구슬.. 그리고 카드 뒷면의 무늬. 새 발자국 같은 대리석 무늬. 수천마리 새의 발자국처럼 반복되는 기하학. 그리고 기하학 뒤에 다른 형태들. 붉은 색 혹은 검은 색. 연기 냄새처럼, 윙윙거리는 레이스처럼 그리고 오래된 이름들처럼... 결정해야 한다. 선들이 흐려지고 기하학은 무너진다. 아! 당신의 머리는 사라져간다. 당신은 동화를 떠난다. 작별을 고한다. 당신은 왔거나 돌아왔다. 소음과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같은 얼굴들이 다시 머무를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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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어느 날 자리에서 손톱이 길어진 걸 보고 갑자기 부끄러워 집에 가버렸다. 손톱이 길어졌다는 건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체중계에 올라보니 몸무게가 몇십 키로가 불었다. 으. 거울 보는게 짜증이 났다. 나는 나의 치장에 대한 처벌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나는 예술가를 동경하여 내 몸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내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것인 양 허리를 구부리고 정신을 놓아버릴 때까지 술을 마시고 일부러 담배를 펴댔다. 물론 이 글 역시 담배를 피며 쓰고 있다. 전화번호를 여러 번 바꾸며 마치 내가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하기도 하였고 퇴폐적인 아티스트로 비춰지고프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동글동글한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를 장발로 길러보기도 하였다. 나와 취향이 조금이라도 비슷한 이에게는 뭐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하였다. 어느 날엔 그 모든 것이 지겨워져 그것을 다 내다버리기도 했는데, 내가 유치하다고 비웃던 이들의 행복에 절반도 따라가지 못한 나를 보았다. 솔직하지 못한 형벌은 그것이 나를 불시에 검문하러 온다는 것이다. 웃긴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고 세상 진지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오고 갔다. 나의 몸에선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어디가 곪아서 진물이 터지나?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자. 음. 내년에는 건강 해지고파! 술담배를 끊진 않겠지만 이제 혼술은 하고 싶진 않다. 새해다짐 같은 것은 아니고 정말로 몸과 정신이 무거워짐을 느껴 위험해질까봐. 한 해 간 놀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지나간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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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onths ago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나는 과거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고 매우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건데, 이는 베르톨루치가 68의 복잡다단한 정치성을 로맨틱하고 관능적인 프레임으로 재단하여 벽에 걸린 그림과 같이 감상하기 좋은 이미지로 재조립한 후 공산품으로 전락시켰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혼란스러운 젊음이 지나치게 매끈하게 압축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씨네필의 자기도취와 지적 페티시즘, 젊고 아름다운 육체들의 연극. 고다르를 오마주한, 루브르 박물관을 뛰어가는 3인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의 이미지가 아닌 혁명 이후 다수의 문화 예술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을 어떠한 감정적 고찰도 없이 묶어내 다시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게 그 영화는 카메라의 기만에 가까웠다. 이런 영화를 기다려왔다. 봉합을 포기해버린 세계를 기다려왔다. 장 으스타슈는 이미지 대신 언어로 젊음을 찢어발겼다. 물론 개봉 시기의 역사적 맥락 때문에 이것을 증언으로 받아들이기 더욱 쉬웠을 수도 있지만, 뒤라스가 말했듯 정말로 이 영화는 피를 흘리며 말하는 듯 하다. 여기서의 세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시대의 상처가 육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으며 본인 존재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나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젊음이라는 환상의 마지막 잔광이 혁명의 현장이 아닌 침대에서 내뿜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하도록 내버려둔다.” 3시간 40분동안 이어지는 대사의 행렬들은 말의 한계를 체험하게 한다. 이 영화는 대사량으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기 보다는 카메라를 고정함으로써 끝끝내 말을 잃게 되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방식을 택한다. 인물들은 말을 하면 할 수록 그 의미를 상실하고 부패한다. 의미를 상실할 수록 내면의 자기 혐오를 키우고 그것을 다시 말로 덮으려 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은 어떠한 해체의 과정처럼 느껴지며 모든 자기기만이 벗겨진 환상은 병리적인 잔해만을 남긴 채 악취를 풍긴다. 말은 신음이 되고 관계는 갈라지며 그 갈라진 틈에서는 오래된 피가 흘러나온다. 인물들은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감옥으로 행하며, 종국에 놀라운 고백을 남긴다. 베로니카의 마지막 독백 혹은 고백. 진정으로 고통이 남긴 유령을 호출하는 놀라운 순간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여전히 말한다. “나는 내가 구토할 때 타인이 지켜보는 것이 싫어!” 언어가 당신의 패배를 보러왔고 영화가 그 잔해를 덮는다. @seoulartcinema 에서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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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onths ago
너는 무엇이 두려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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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onths ago
이제 당신은 기차를 탄 소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몇가지 이야기를 해드릴 것이고, 약국 시퀀스에 대해 얘기해 볼 것이며 마지막엔 완벽히 몰락하게 됩니다. 어떤 남자의 일련된 사건에 따라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도시 일곽, 새, 거리의 남자, 잠자는 남자, 꿈꾸는 남자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도시, 정체불명의 장소, 평범한 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의미의 종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1. 어느날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우리는 함께 있다. 나는 몸과 영혼의 모든 기억을 잃는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내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일단 모든 것을 다시 배우게 되면 나는 그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한다. 이야기 2. 어느 날 나는 거리에 있다. 그리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몸이 편치않음을 느낀다. 전화로 누군가에게 날 도와달라 말한다. 이야기 3. 어느 날 나는 비누를 사러 약국에 간다. 그들은 내게 비누 두 개를 보여준다. 하나는 예쁘게 포장되어있었지만 향이 너무 강했다. 하나는 달콤한 냄새가 났지만 포장이 끔찍했다. 어느쪽을 택할까? 이야기 4.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모든 이미지들은 진짜다. 이야기 5. 이야기 5는 없다. 진실, 우리는 이 야생적인 특성과 차가운 야망을 억누른다. 우리는 꿈을 꾸고 있다. 왕은 스스로 왕을 꿈꾸며 거짓말로 처분하고 통치하며 살아간다. 그가 받는 박수갈채는 바람에 쓰여 있지만 죽음은 그것을 잿더미로 만든다. 인간은 죽음의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린다. 부자는 지류를 뒤덮을 만한 자신의 부를 꿈꾼다. 고통받는 가난한 자는 그의 불행과 가난을 꿈꾼다. 일에 대한 야망을 가진 자는 빌어먹게 축복받을 번영을 꿈꾸며 결론적으로 이 땅의 대부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꿈을 꾼다. 나는 내가 족쇄에 채워진 채 여기에 있는 꿈을 꾼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다른 쾌적한 곳에 있음을 꿈꿨다. 삶이란 무엇일까? 어리석음이 아닐까? 환상이 아닐까? 그림자이자 허구이지 않을까? 가장 위대한 행복마저도 무가치하다. 삶은 그저 꿈에 불과하고 꿈은 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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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onth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