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근황을 이야기하려면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모두가 아시는 대로 펜데믹을 지나며 영화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절망도 있었고 또 다른 기회도 있었다.
20여 년 같은 일을 하면서 변화 속에서 내가 어떻게 창작자로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보려 했고, 나 나름의 방식과 속도로 성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세상은 예상보다 더 거칠고 변화도 많았다. 하고자 했던 많은 시도와 노력이 불가항력적인 일들로 무너지기도 했다.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로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을 갈아 넣고 몇 년 동안 흘린 땀이 아무런 결실도 없이 사라질 때다. 때로는 그런 일이 연속되기도 한다. 큰 의미를 두고 혼신을 다했던 프로젝트가 손에 닿을 듯하다가도 손끝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쉬움에 연연하기보다는 다음 과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변화의 시기 덕분인지, 전에 해보지 못했던 다른 방식의 창작을 시도하기도 하고,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도전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다행히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 그리고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저예산 영화라 조금씩 예산을 확보하며 완성하고 있어 후반작업이 다소 느리지만, 내게는 배부른 작업이다. 무대 위에 배우들이 오르고, 그곳에서 어렴풋한 상상이 실제가 되는 순간, 내게는 도파민이 터지는 멋진 경험들이었다. 관객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에 수고해준 동료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 아마도 내년에 개봉할 두 편의 영화다.
그리고 요즘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새로운 대본을 쓰고 있다. 완성이라는 결실까지 맺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무대와 배우들을 꿈꾸며 내가 할 일을 해본다.
세상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가끔 영화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점점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업계와 창작에 대한 대화 속에서도 영화 이야기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빠져 있다.
영화 시장에 대한 거창한 글을 쓰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얼마 전, 마이크 리의 신작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서 ‘직업으로서의 영화’를 생각했다. 영화 창작은 잡히지 않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는 행위다. 내가 느끼는 ‘사라지지 않고 손끝에 닿는 순간’은, 희미한 공상에 불과했던 이미지가 무대 위 배우의 살아 있는 대사로 되살아나는 그때다. 나의 상상도, 지금의 현실도 온통 불투명한 것들뿐이지만, 노력과 시도가 남아 있다면 창작자로 살아갈 수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열일곱 번째 ’아이맵스’ 편에서는 김종관(@monologue707 ) 감독과 그의 여러 작품 속 공간들을 동행했습니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페르소나: 밤을 걷다>, <조제> 등 다수의 작품을 선보인 그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작업실, 중요한 캐스팅이 있을 때 방문하는 애정 깃든 식당과 방앗간처럼 드나드는 카페를 소개했는데요.🤎 또한 직접 연출한 영화와 세븐틴 원우&민규의 ‘Bittersweet’ 뮤직비디오 등에 등장하는 옥인동 골목들을 산책하며 각 작품에 담긴 추억들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아이즈매거진>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 풀 버전을 확인해 보세요. 🎥 아이즈매거진
10년 동안 많은 상념과 창작의 시간을 함께했던 옥인동 작업실과 작별하게 됐다. 2016년 지인에게 물려받아 적지 않은 시간을 이 공간에서 보낼 수 있었다. 작은 방 하나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같았다. 변화무쌍하던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 시간들을 내 안에 기억으로 남겨두려 한다.
무주산골영화제 개막공연.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 라이브>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서로 다른 계절을 배경으로, 서촌이라는 서울의 작은 동네를 맴도는 결핍 많은 여러 인물들의 하룻동안의 방황기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팬데믹 이후 다시 찾아온 삶의 여유로움과,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어떤 증후들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음악은 이태훈 음악감독과 나래 음악감독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태훈 음악감독은 이미 국내에서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뛰어난 연주자이며, 그의 연주와 음악을 오래 애정해온 팬으로서 영화음악 작업에 대한 러브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영화음악가로서 이태훈의 첫 도전이기도 합니다.
이번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이 영화의 공동 음악감독이자 항상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뮤지션 이태훈과 함께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의 개막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촬영 중, 눈앞에 펼쳐진 로케이션과 그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우연의 선물처럼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저는 가끔 스스로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이태훈 음악감독과의 작업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는 미완성의 영화를 틀어놓고 느리지만 꼼꼼한 방식으로, 때로는 즉흥적으로 영상 위에 음악을 얹어갔습니다. 그 순간, 좋은 우연들이 눈앞에 놓인 자연의 풍경처럼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저 역시 다시 한 명의 관객이 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번 무주의 관객들 앞에서, 영화가 살아 움직이며 완성되는 그 순간을 함께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제>, <더 테이블>, <아무도 없는 곳> 등 많은 작업을 함께해온 저의 오랜 파트너 나래 음악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나래 음악감독은 이태훈 음악감독의 개성 있는 음악이 스크린 위에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가 만든 멜로디 위에 깊은 대화를 나누듯 또 다른 멜로디를 더했습니다. 마치 두 명의 훌륭한 배우가 서로의 연기에 반응하고 몰입하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개성이 다른 두 음악가의 협업을 통해 저 스스로도 자부할 수 있는 멋진 음악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주산골영화제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는 ‘계절영화’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서촌의 사계절을 담아 한 권의 소설집 같은 영화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개인의 자본으로 만든 단순한 컨셉의 영화이지만, 저에게는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절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이야기들을 계속 만들어가려 합니다.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의 개봉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영화제를 통해 먼저 관객분들과 만날 계획입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배우들과 함께 찾아뵐 예정입니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곧 재밌는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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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하는 그날까지, 그리고 이후 이어질 계절영화 시리즈에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Artists of Here Comes Spring — 06
김종관 Kim Jongkwan @monologue707
”새로 난 것은 아무 기억이 없다.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낮이 밤을 알지 못하듯, 겨울을 알지 못하는 봄이 있다.
그리고 죽음과 죽음을 보면서 살아남은 것들이 있다.
그들은 낮에 있지만 조용히 그 밤을 기억하고 있다.
다시 축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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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김종관은 어피스어피스의 첫번째 전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영화가 촬영된 공간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영화 속 배경과 실제 관람 장소가 하나로 겹쳐지는 생경한 경험은 공간과 창작의 서사가 만나는 어피스어피스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낮과 밤〉은 서촌 사직동의 한 장소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시간에 촬영된 두 점의 사진입니다. 활짝 피어난 낮의 개나리와 꽃이 진 이후의 밤의 장면은 같은 자리이지만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하는 시간의 단면을 담고 있습니다.
감독은 계절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고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며,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온 찰나를 다시 마주하게 합니다.
낮과 밤 #1
21 x 29.7cm
Giclée print on Hahnemühle White Velvet paper
Edition of 20 (signed and numbered),
2013
낮과 밤 #2
21 x 29.7cm
Giclée print on Hahnemühle White Velvet paper
Edition of 20 (signed and numbered),
2013
숲과 고양이
29.7 X 42cm
Giclée print on Hahnemühle White Velvet paper
Edition of 20 (signed and numbered),
2016
작품 구매 및 문의는 DM 또는
[email protected] 으로 부탁드립니다.
images courtesy of @monologue707@ahnadasia@mrvertig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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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Jongkwan Kim introduced a unique exhibition format through the inaugural show 〈Made-up Story〉, where a film was screened within the very space in which it was filmed. This rare experience, where the cinematic backdrop and the actual viewing space converged,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for establishing the identity of a piece a peace—a space where environment and creative narrative meet.
For this exhibition, he presents 〈Day and Night〉, two photographs captured at a single location in Sajik-dong, Seochon, at different times. The works depict forsythias in full bloom by day and the scene after the flowers have fallen by night—two distinct states of time coexisting within the same place.
By capturing moments of emergence and disappearance within the flow of seasons, Kim invites us to re-encounter the fleeting fragments of time we may have passed by without notice.
<Here Comes Spring, 봄이 오면>
a.p.a.p. 5th Anniversary Group Exhibition
2026.03.28~04.19
Wed~Sun, 2~7pm / Final day(04.19): 2~5pm
4F, 48, Pirundae-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
클레어 키건. <맡겨진 아이>
두 시간 남짓의 비행 동안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소녀가 행복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안도와 슬픔이 있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밀밭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늘한 여름이 있는 곳, 바다가 곁에 있지만 바람은 차지 않고
밀밭 사이로 길게 난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발걸음은 편한 곳을 상상해 본다.
그곳에는 고통이 없다.
불편한 기억도 먼 곳으로 물러난다.
비난하는 이도, 냉소를 드러내는 사람도 없다.
마음으로 어깨를 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상처 줄 사람도 없다.
잠시 머물고 행복을 기억하고 내가 온 곳으로 다시 떠난다.
여행과 나날을 보았다. 계절이라는 감각으로 시를 쓴 것 같았고 아름다우면서 사색적인 이미지들이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어느 부분 나와 같은 시도를 하는 창작자에 대한 동질감도 느꼈다. 마디마디 세공된 결들을 채워서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영화를 만든 것이 반가웠고, 그 소박함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 영화의 외로움이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처럼 나 또한 언젠가 내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희망한다. 여행과 나날을 보고 겨울밤 두 손으로 따듯한 차 한 잔을 쥐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