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던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를 드디어 봤다. 이제서야 해치운 건 아마도 제한적인 관람 기회와 러닝타임의 압박 때문에? 과거의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이 시대의 필연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품위 있는 퇴장을 준비한다는 186분짜리 이야기다. 거창하고 아름답고 길고 또 긴데 전개와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했던 신들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러닝타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후반부의 파티 장면은 객석에서 그 화려함에 압도되었다가 발을 적시는 빗물처럼 피로감이 서서히 차오르는 걸 느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체험이다. 버트 랭커스터가 근사하게 연기한 살리나 왕자는 조카인 탄크레디(알랭 들롱)와 그의 약혼녀 안젤리카(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야심만만한 젊음에 감탄한다. 자신은 너무 늙고 지쳤으며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언뜻 밝히는 나이가 마흔다섯 짤… 이보시오 살리나 동생.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1. 최근에는 패티 스미스의 <패티>를 읽었다. <저스트 키즈>때부터 늘 그랬지만 이 분의 기억력은 놀랍도록 디테일하고 촘촘해서 어느 정도는 픽션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거의 초능력처럼 느껴지는 수준. 아무튼 아티스트 특별 전형으로 태어난 듯한 분이고 그래서 읽는 동안 과연 이런 인생은 어떤 경험일지 궁금해하게 된다. 오늘은 계시이자 예언이고 내일은 운명이 준비한 모험인 삶.
2. 서점에서 오랜만에 잡지를 들춰봤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텍스트 폰트가 너무 작아서 거의 읽을 수가 없었음. 같은 시기에 일했던 분 중 상당수가 아직 현업에 계신데 다들 노안은 괜찮으신 걸까. 나는 이제야말로 다초점 렌즈나 클립온 돋보기로 갈아타야 할 때가 됐나 봄.
사실 나가사키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따로 있다. 후쿠노유 온천. 이미 충분히 유명해서 새삼스럽게 추천을 하려니 괜히 뒷북치는 기분도 든다. 위치는 이나사야마로 이어지는 언덕 쯤이다. 나가사키역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20여 분을 올라가야 한다. 사우나도 운영하지만 그건 생략하고 바로 노천탕으로 향했다. 나가사키 시내를 발밑으로 내려다보면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 나는 료칸의 핵심은 가이세키 요리도, 다다미 숙소도 아닌 노천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후쿠노유에 왔더니 굳이 료칸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손발이 불어 터질 때까지 멱을 감는 데 딱 850엔만 쓰면 된다(단, 사우나까지 함께 이용하면 가격이 달라진다. 수건 대여 비용은 별도고 입장 시 3엔의 지방세도 따로 내야한다).
당연히 직접 찍은 내부 사진은 없지만 마지막 슬라이드의 안내판 이미지를 보면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경사에 맞닿은 앞쪽에는 인피니티풀스러운 공중탕을 설치했고 뒤편에는 아담한 개인탕도 서너 개 준비해뒀다. 딱 한두 명이 들어갈 크기의 개인탕은 도기 재질이다. 초등학생 때인가 <서태후>라는 홍콩/중국 합작 영화가 국내에서 개봉했는데 내용은 다 까먹었고 딱 한 장면이 기억난다. 춤추는 궁녀의 자태를 황제가 칭찬하자 질투를 느낀 서태후가 여자의 팔다리를 자른 뒤 목숨만 붙여 둔 채로 장독에 가둔다. 동전에서 김민지 이름만 찾아도 자지러지고 빨간마스크와 홍콩할매 괴담에 심취했던 초딩들의 호기심을 저격하는 바람에 동년배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된 작품이다. 옆으로 좀 샜는데 아무튼 후쿠노유의 개인탕이 대략 서태후 장독처럼 생겼다는 이야기다. 여기 혼자 들어가 앉으면 공중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아늑하다. 멀리 하늘과 도시가 있고 나이도 체형도 다양하게 제각각으로 벌거벗은 뒷모습들이 보인다. 그 장면이 은근히 포토제닉하다고 생각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나가사키에서 1박을 해보려고 한다. 후쿠오카에 본진을 두고 당일치기를 하느라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던 게 아쉽다. 다음에는 노천탕에서 좀 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따뜻한 물속에 앉아 내려다보는 나가사키의 야경이 궁금하다.
<서태후>는 신작과 구작을 묶어서 상영하는 그 옛날의 동시 상영관에서 봤다. 같이 틀어준 영화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으니 나름 파격적인 프로그래밍이었던 셈이다. 보기 전에 내가 더 기대를 한 건 <서태후>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쪽이었다. 취향이 남달리 조숙한 초딩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일종의 영업 사기를 당했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 기회에.
와타베(わたべ)는 노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나가사키의 음악다방이다. 자신 있게 추천하기에는 왠지 눈치가 보이는데 그다지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킷사텐의 고즈넉한 무드를 즐기고 싶다면 고택을 카페로 개조했다는 난반차야가 차라리 더 나은 선택일 거다. 와타베는 인스타 성지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밝고 어수선한 구석 없이 단정하다. 그래서일까? 나가사키의 대표 관광지인 오란다 자카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나와 친구가 들렀을 때는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우리 외에 손님은 노신사 한 분 뿐이었고 그나마도 몇 분 만에 자리를 뜨셨다. 이후로 다른 방문객은 없었다. 어색하게 구는 외국인 둘이 본의 아니게 공간을 독차지했다.
일단 커피부터 한 잔씩 주문해 본다. 등이 둥글게 굽은, 연세가 지긋한 남자 사장님이 융 필터를 깔고 느릿느릿 뜨거운 물을 내리셨다. 서빙은 좀 더 움직임이 날렵한 여자 사장님의 몫인 듯했다. 커피는 다소 진한 편인데 풍미가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카페인이 급했던 타이밍이라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홀짝거렸다. 사실 일부러 와타베를 찾은 이유가 커피는 아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남자 사장님이 두툼한 문서 바인더를 하나 가져다주신다. 노래방 책인가 싶은 물건의 정체는 소장 중인 엘피와 시디 목록을 기록해 둔 카탈로그다. 테이블 위에는 볼펜과 신청 서식(펜으로 그려 만든 양식을 여러 장 복사해서 쌓아 두셨다)도 준비되어 있다. 내용을 채워 전달하면 사장님이 해당 음반을 찾아 들려주신다. 가게 안쪽에 자리를 잡은 오디오 시스템은 기계치가 언뜻 훑기에도 비싸고 만만치 않아 보인다.
사장님의 아카이브가 커버하는 장르는 클래식과 재즈다. 그런데 곡이 아니라 앨범 단위로 감상 신청을 받으셔서 좀 당황했다. 역시 손님이 많은 가게가 아니어서…? 카테고리, 작곡가, 연주자 별로 꼼꼼하게 정리된 문서를 뒤적거려서 러닝 타임이 그리 길지 않은 재즈 보컬 음반을 하나 골랐다. 잠시 후 뇌리를 스치는 합리적인 의심. 지나치게 인심이 후한 와타베의 음악 신청 시스템에는 음반을 수시로 교체하는 데 쓰는 수고를 줄이려는 노련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할 일을 마친 사장님이 카운터 뒤로 사라지시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고개를 묻은 익숙한 자세로 졸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숨을 쉬려고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돌고래처럼 둥글게 굽은 등이 바 테이블 너머에서 솟아올랐다가 조용히 가라앉는다. 느린 상하운동을 곁눈질하다가 문득 앞을 봤다. 졸음에 전염이 됐는지 친구도 눈을 감은 채 꾸벅거리는 중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테이블 너머에서 시계추처럼 왕복운동을 한다. 사장과 손님이 상하와 좌우로 조는 동안 사라 본의 나른한 목소리로 실내가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멍을 때리는 시간이 심심하게 괜찮았다. 평화롭게 1시간 정도를 낭비한 뒤 모두가 좀 더 개운해진 상태로 헤어졌다는 해피엔딩.
예술의 힘은 뭘까?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사이더들은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비밀을 공유하는 걸까? 비앙카 보스커는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결국 저널리스트다운 방법을 동원해 호기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언더커버 요원처럼 업계에 잠입해 폭 넓은 인연을 맺으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내용을 약 50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기록했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저자가 뉴욕 현대 미술계의 복잡한 층위를 종횡무진 훑으며 완성한 모험극 같은 르포르타주다. 보스커는 두 곳의 갤러리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마이애미 아트 페어 부스에서 작품을 판매하고, 한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엉덩이 밑에 깔렸다가 또 다른 아티스트의 어시스턴트가 되기도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로 일하는 한편 열성적인 컬렉터 커플의 아트페어 투어에도 동행한다. 우여곡절의 에피소드를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쏟아내는 필력도 쫄깃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망설임 없이 낯선 세계를 탐험하며 도전을 거듭하는 저돌적인 에너지다. 겉만 우아하게 핥는 대신 수년 간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구르며 써낸 글이라 디테일이 구체적이고 이야깃거리도 다채롭다.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작가가 대단히 참신한 결론에 도달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면서도 원론적인 교훈의 재탕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예술의 가치가 맥락이나 파워 게임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삶의 태도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당연한 결론의 타당성을 작가 자신의 경험과 변화를 근거로 성실하게 설득한다.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답을 주는 여정도 있다.
프로젝트를 막 시작했을 무렵, 비앙카 보스커는 온갖 갤러리에 어시스턴트 지원서를 넣지만 번번이 무시당한다. 그러다가 간신히 잭 배럿이라는 힙스터 전시 기획자 밑에서 전시장 페인트칠부터 보도자료 작성까지 온갖 작업을 보조할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이 묘사하는 잭 배럿으로 말할 것 같으면 뉴욕 밀레니얼 남성 갤러리스트 버전의 레지나 조지이자 아크네 스니커즈를 신은 미란다 프레슬리다. 어시스턴트의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고 숨 쉬듯 가스라이팅을 하며 미술계의 괴상한 규칙을 주입한다. 이를테면 “작품이 팔렸습니다”라는 값싼 표현 대신 “소장이 결정되었습니다”라는 은근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에 대한 비앙카 보스커의 대응은? 1년 가까이 갑질을 버티며 수집한 배럿의 어록과 기행을 책에 자세하게 옮겨 놓았다. 감정적인 비난은 한 마디도 없지만 작가의 전 보스를 허세 가득한 개새끼처럼 보이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내용이다. 물론 저자 후기에 감사 인사를 남겨 깍듯하게 엿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잭 배럿이 <퀸카로 살아남는 법> 풍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논픽션이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이야말로 복수의 진정한 대단원이다. 말발 좋은 창작자에게 원한을 사는 일이 이렇게나 무섭다.
이번 주 재오픈한 더숲 아카데미 하우스. 원래는 1960년대에 기독교 교육 및 사회 공헌 목적으로 지어진 시설이다. 부지 6천 평에 건물 7채 규모고 북한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을 주위에 두르듯이 끼고 있다. 1960년대에 기독교 교육 및 사회 공헌 목적으로 세워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목적을 잃고 방치됐던 곳인데, 초소책방, 더숲아트시네마 등을 운영 중인 문화플랫폼 더숲이 새롭게 위탁 계약을 맺고 리노베이션을 진행했다. 사실 여기는 몇 년 전에도 카페로 활용된 적이 있었고 내 첫 방문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운영을 담당한 업체가 수익 실현에 실패했는지 하청 용역 대금도 제때 지급을 못 하고 임대료도 밀리고 우여곡절 잡음을 일으키다가 급작스럽게 퇴장한 것으로 안다. 아무튼 1년이 넘는 공사 끝에 드디어 문을 열었다길래 일부러 찾아갔는데 확실히 예전보다 공간이 훨씬 정리된 느낌이다. 본관의 베이커리 북카페와 숙박이 가능한 북스테이부터 먼저 개시했고 기타 시설 및 프로그램은 4월 말 공개 예정이라고. 서울 안에서 서울 같지 않은 곳에 가고 싶을 때 고려할 만한 옵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