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휘

@longpap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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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존감이 멋지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대개 재미있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존감. 언젠가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아주 멋진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 선보일 멋진 이야기가 아직 없다는 건, 내가 멋진 인간이 되는 데 (현재로선) 실패했다는 뜻이다. 재미는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27세 클럽 명단에 오르기를 꿈꾸는 건 27세 미만의 젊은이 뿐이다. 아니 대충 25세 미만일 것이다. 요절의 꿈은 마감 기한이 있고, 여차하여, 기한 내에 안 되겠다 싶으면 일단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실패에는 수명 연장이라는 효험(positive~)이 있는가보다. 구교환이 <요정재형>에 나왔고 정재형에게 예쁜(?) 마라소스를 선물 받았다. 피규어(??)처럼 갖고 있고 싶댔다. 너무 예쁘고 좋은 선물을 받으면 못 따겠고, 그렇게 항상 냉장고에서 유통 기한이 지나 있다. 많은 마음들이 그랬던 것 같다. 예쁘고 좋은 마음들. 잊은 채 지나고 보면 이미 늦어 있는 마음들. 선물 같은 것. 기회들이, 시간들이 그런 것도 같다. 삶이 준 선물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풀러보지 않고 쟁여만 둔다.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서 조용히 제 기한을 넘긴 기억들. 겨울을 보내고 있다. 2월이기도 한데, 비유로 하는 말이다. 비유래놓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픈 건 버릇이다. 특별히 불행하다는 뜻도, 계절처럼 지나가리라는 기대도 없이, 그냥 겨울이다. 어떤 실패들이 훗날 자양분이 되리라는 건 믿음의 문제고, 과도한 양분은 삼투현상을 일으키며 토양 곰팡이 증식의 요인이 될 뿐이라 생각하는 건 기질이다. 발코니에 뒀던 식물들이 냉해를 입어 실내로 들여왔다. 식물들이 급격한 온도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수수 죽어간다. 급격한 죽음을 내가 불러왔다. 받은 마음과 쟁여둔 기억이 병조림인지 화분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느 쪽도 유비일 뿐이고, 별다른 논리는 없다. 직사광선을 피해야 할지 볕을 쬐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통풍은 중요한 것 같다. 바람을 쐬면 좋으려나. 직관과 달리 자연 환기보다 기계식 환기가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과학적 데이터를 놓고도 쉽게 불신하는 버릇이 인간 본성인지 개인의 기질인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집엔 기계식 환기 장치가 없고, 거실에선 실링팬과 공기청정기가 기계장치를-이용한-자연-환기-흉내에 애를 쓰고 있다. 창을 열고 싶지만, 아직 너무 겨울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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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남지 않는 삶이었다, 라고 남겨지겠다. 라고 생각했다. 평전은 못 되더라도 비문 정도는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적으로는 알 수 없고 심정적으로는 아직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20대 초반쯤, ‘1인분의 삶’이란 말을 종종 되뇄다. 딱 그만큼 살아야지 하면 가벼웠다. 몫이란 말에서 책임의 낌새를 제쳐두곤 했다. 홀몸으로 살다보면 한몫 챙길 날 절로 오고, 한몫해야 하는 때가 온대도 거뜬할 줄 여기며. 후에 이동진 평론가가 서명에 “흘리지 않는 1인분의 삶”이란 문구를 쓴다는 걸 알게 됐다. 우연히 유사한 표현을 애정하게 된 것인지 어디선가 스친 그의 문장을 내가 쟁여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표절 가능성이 있는 슬로건을 더 이상 되뇌지 않게 됐다. 흘리지 않는다는 건 넘치거나 남지 않는다는 것. 1인분이란 여분이 없는 삶을 말하겠다. 삶에 정량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편의상 표준을 만들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삶, 남음, 사는, 남는. “삶은 남는 장사”라고 말해본다. 소리내서 그렇게 한다. 따로 논리가 있는 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계속할 수 있다. 밑지는 장사는 접어야 하니까. 바꿔 말하면, 삶의 마지막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남지 않는 삶이었다. 삶에서 한 번은, 그렇게 말해도 된다. - 여분이 있는 삶이란 뭘까. 여유는 태도고 태도가 인성이고 인성은 지갑에서 나오니까, 돈이 남아도는 삶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전히 인생을 장사로 본다면 그럼직하다. 그러니까 남지 않는 삶이었다, 떳떳하게 말하고 눈감으려면 공수래 공수거 해야 한다. 사는 동안 필요한 만큼 벌어 쓸 만큼 쓰고 한 톨 남기지 않고 가면 된다. 대차대조표 양변 합 잘 맞춰 집합손익 상계하고 이익잉여금 아주 없이, 남을 자산도 부채도 없이, 그런 때 폐업하면 된다. 부지런히 벌어 더 부지런히 터는 방법도 있지만 애초에 안 가져도 상관없다. 전자가 청교도적 미덕일 텐데 자주 후자로 마음이 기운다. 나태지옥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 밖에 또 남을 것 무엇일까.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 있겠다. 다만 시간은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 없다. 남은 육신은 그 시간 따라 금세 남김없을 것이다. 사람은 가죽으로도 안 남는다. 그럼 또, 이름. 세간에야 안 남겠거니 별 문제 아니지만, 비문으로 무엇을 남기는 계획은 모순인 듯하니 접어야겠다. 유언도 애초에 남기는 말이니까 안 되겠다. 단말마로라면 괜찮겠다. 소리는 멀어지니까. 먼 데서 사라지니까. 단말마는 불교에서 온 말이다. 마지막 순간(斷末)에 찾아오는 마구니(魔), 그러니까 고통이다. 불교니까 이 고통도 번뇌에서 온다. 더 살고 싶다거나 이렇게는 못 간다는 집착을 가리킬 테다.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 다 남는 것들이다. 그마저도 남김이 없어야 다시 안 태어난다. - 누가 자기 죽음을 상상하는 동안 그 누구를 사랑하는 이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장면을 매일같이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이 너무 커서 그렇게 한다. 얼마만큼 커질지 몰라서, 그마만큼 찾아올 상실의 크기를 가늠 못 해서, 미리 자주, 예행 연습을 한다. 이른 준비를 한다. 나는 남지 않는데 남겨진 사람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마만큼 이상한 것들은 대개 사랑이 하는 일이다. 번 만큼 다 쓰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인 건 더 이상한 일이다. 돈과 양심과 꿈과 후회와 힘과 나. 다 써버리든 그냥 버리든 남을 것 없는데, 내가 남기든 안 남기든 절로 남겨지는 것이 있다는 이상한 일. - 삶은 남는 장사다. 별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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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ago
오래 잤다. 주로 잠들어 있었다. 반년쯤. 집에서. 지하철에서. 비행기에서. 자면서 위도와 경도를 바지런히 옮겨 다녔다. 극동에 사는 탓에 어지간한 나라로 가면 늘 시간이 역행이었다. 항로 위를 움직이는 동안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고 어느 나라의 영공인지 알 리 없었다. 그럴 땐 잠이 적당했다. 시간도 공간도 의미 없는 허공이니 의식도 저 깊은 데 처박아 두면 좋을 일이다. 깨어 있는 동안은 주로 아팠다. 탈이 자주 났다. 몸이 무겁거나 머리가 무겁거나 했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잠 많게 태어난 덕에 죽음 연습에 소질 있다곤 해도, 별 수 없이 때 되면 깨어났다. 삶으로 깨버렸다. 살면 아프지. 어쩜 맞는 말을 다들 참 오래 전에도 했다. 싯다르타도 잠이 많았을까. 인생을 자꾸 여정에 비유하니까 사는 내내 노숙이다. 요람과 무덤에서 잘 때만 집이고, 그 밖의 모든 잠은 노숙이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노변의 피크닉』을 놓고 타르콥스키는 <스토커>를, 비간은 <카일리 블루스>를 만들었다. 좋은 영화들이다. <스토커>의 국내 번안은 잠입자였고 <카일리 블루스>의 원제는 노변야찬路邊野餐이다. 아무튼 인생은 소풍이고 잔치다. 나는 침입자고 (불청)객이다. 잠에 들 때마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라는 발상은 제법 낭만적이다. 죽을 순 없지만 죽는 기분은 낼 수 있다. 사실 사는 것도 기분이나 내는 거다. 어차피 노숙인 거 캠핑이라 치고. 애초에 떠도는 거 피크닉이라 치고. 근데 요새는 기분이 잘 안 났다. 눈물과 화와 짜증. 가뭄에 콩 나듯…이란 건 아주 안 난다는 소리다. 대흉이다. 우리집은 여전히 제사를 지낸다. 유구한 기분 내기다. 귀신은 지평좌표계를 고정할 수 없고 제사상 올린다고 채울 배가 없다. 기분이나 낸다. 조상은 조상대로 먹었다 치고, 후손은 후손대로 할 도리 했다 치고. 오랫동안 ‘흠향하다’의 뜻을 냄새香를 즐긴다鑫쯤으로 짐작했다. 병풍 뒤에서 향냄새 밥냄새 맡는 거니까. 알고 보니 냄새랑은 별 관련 없고 흠향할 흠歆에 잔치할 향歆을 쓴다고 했다. 죽어서도 피크닉이다. 중국어에선 향을 ‘맡다’에 들을 문闻을 쓴다. 맡을 후嗅보다 흔히 쓰인다고 한다. 냄새를 듣는다. 재밌는 건 미각을 뇌로 전달하는 고삭신경도 귀의 이소골 사이를 지나가기 때문에 귓병으로 미각을 잃는 수가 있다고 한다. 다도에서 청향聽香이라 말하는 게 일리가 있다. 다들 참 오래전부터 맞는 말을 했다. 향을 듣는다. 낭만적인 표현이겠다. 눈을 감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죽은 듯이. 눈 감는다고 언제나 잘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감은 눈으로 낮을 지새우는 날도 있다. 그럴 때 대만에서 사 온 차를 마셔 보고 있다. 이것저것 듣고 있다. 향과 맛과 소리. ─깨어날 시간이야. 그런 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다. 눈을 뜨면 방 한 칸만 한 손이 나를 푹 우리고 있는 꿈을 꾼다. 푹 잠겨 있다. 알람 끄고 산 지 반년인데 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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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onths ago
실은 더 멀리 가고 싶었지. 작년이 재작년 되고 올해가 지난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지. 수학여행 자유시간 끝나고, 불국사 청운교였는지 반구대 암각화였는지, 한 바퀴 둘러보고서 점심을 먹었고, 찬 도시락을 먹었을 것이고, 몇시까지 주차장으로 모이세요, 그런 말을 나도 들었을 것이고, 조금 늦었나, 두고 온 것이 있었는지 못 버린 것이 있었는지, 어정거렸거나 서성거렸거나, 많이 늦었나, 도착한 흙마당 주차장엔 누구 없고 관광버스 간데없고. 나만 우두커니. 이런 일은 작년이 아니라 십수 년 전의 일. 아니 사실 그런 적 없었던 일. 작년에 있었던 건 다른 일이다. 내가 뭘 놓고 왔나 어기적대는 사이 시간이 날 두고 간 것 같다. 나는 여기 있고 시간은 갔네. 잃어버린 시간 같은 것은 없고요, 따지자면 시간이 절 잃어버린 거지요. 이럴 땐 어따 신고해야 맞는 걸까. ①미아 ②분실물. 물론 접수된 신고 하나 없고, 시간은 날 잊고서 잊은 줄도 모른다. 그래도 만약에, 십수 년 전이든 몇 겁 전이든 내생이든, 정말로 텅 빈 주차장에 남겨진 내가 있다 치면. 낙오래봐야 황당할지언정 부끄러울 일은 아니다. 분명 그뿐인데, 만약에, 뒤통수 긁으며 돌아본 곳에 이 모든 일 지켜보고 있던 눈 있다면.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이상하지. 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지는 걸까. 그제야 치욕일까. 까닭 없이 서러워질까. 그나저나 어디로 가려던 걸까. 버스를 타면 어디로 가나. 집으로 가나. 나 집에 가고 싶었나. 아닌데, 그것보단 더 멀리 가고 싶었을 텐데. 정말 멀어, 멀고 멀어 머나먼 곳. 이를테면 ①남쪽나라 ②서방정토. ①열기구가 뜨려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버려야 한다고 해서, 일단 시키는 대로 뭘 자꾸 내던져는 봤는데, 근데, 왜 위로 가야 하더라. ②물 차는 배가 가라앉지 않으려면 열심히 퍼내야 한다고 해서, 일단 급한 대로 허둥거려는 봤는데, 그러니까, 왜 가라앉으면 안 되더라. 때가 때니까, 해 지고 해 뜨는 거 보며 앉아 있다. 오늘 퍼질러 앉은 곳이 땅바닥인지 고봉인지 천변인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서서 볼 건 아니다 싶어 주저앉아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새해에는 올해의 해가 뜨지요. 오늘도 내일도 뜹니다. 끝없이 뜹니다. 물론 지는 일에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끝도 없이 하염없이. 집니다. 반복되는 것은 무한이지만, 한 점 향하는 바가 있으면 수렴이고 없으면 발산이랬다. 그러니까 여기 계속 앉아 있을 요량이면 값있는 끝 되고, 털고 나서면 그 끝 없다. 결국 돌아오더라도, 다시 오고 이내 가더라도. 생각해보면 뜨는 해만 소원을 들어준다는 법은 없지. 오늘은 퇴근길 지는 해에 소원을 빌었다. 아주아주 오래된 장래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떠올랐다가 다시 잊었다가, 그러기를 오래도록 반복해왔던 것 같다. 그런 꿈속에서 언제나 나는, 다음 사람. 이담에 크면요 저는 다음 사람 할래요. 초 불어 끌 케이크도 없는데 훅, 소망 없는 바람이 지나간 것도 같다. 이젠 해 바뀐다고 나이 먹는 것도 아닌데, 멈추어 밀린 시간들 훅 가버린 것 같다. 진짜로 빚진 몇 살 한 방에 후룩 먹은 것은 아닐 텐데. 그래도 훅. 별안간 멀리 떠밀려온 것 같다. 오고 보니 가려던 곳, 가야 할 곳 이쯤이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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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요즘 같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봉제산으로 이사온 지 2년째다. 산에 사는 산사람 되어 매일 산 탄다. 실상은 뒷동산 수준이지만, 운동과 척진 지 십수 년 된 체력으로는 체감상 준-등산이다. 산 타며 생각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물론 승리하는 건 정신뿐이고 육신은 번번이 진 것 같다. 집에서 남창을 열면 까치산이 보인다. 서창으로는 가파른 눈길, 뒤뚱거리는 사람, 버려진 매트리스 위로 녹지 않는 피로들. 그래도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손을 뻗으면 하늘이 곧장이다. 문제 많은 구옥, 그거 하나 좋았다. 하늘에 닿은 큰 창. 그러고 보면 방범창도 없어 사람쯤은 쉽게 드나들 만한데 한 번도 잠가본 적이 없다. 도둑 들면 어떡해. 요즘 같은 세상에 도둑이 어딨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우리집엔 훔쳐갈 거 없어. 도둑은 그걸 모르잖아. 와 보면 알겠지, 역시, 뭐 없구나. 전에 살던 집엔 도어락이 없었다. 그 전 셋방에도. 요즘 같은 세상에도 열쇠를 쓰는 집이 남아 있다. 내가 간수를 잘할 리 없으니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집주인에게 스페어키를 받아 복사하곤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열쇠집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러기를 대여섯 번, 마침내 집주인에게 사정하는 일이 성가셔지고부턴 아예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다녔다. 딱히 도둑이 든 적은 없다. 아닌가. 모를 일이다. 빈손으로 다녀간 절도 미수범이 몇 있었을지도. 텄네 텄어, 털 만한 게 없구만, 하며. 언제나 열린 집에서 몇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산타는 다녀가지 않았다. 우리집만 한 방문처 또 없었을 텐데. 잠입할 굴뚝은커녕 지문과 안면과 홍채 인식까지 해야 문 열리는 세상에. 도둑도 패싱하는 마당에 산타라고 볼일 있겠냐만. 산타가 없다는 걸 언제 알았지? 잔혹한 진실과의 대면식을 묻는 거라면 역시나 기억에 없다. 산타의 존재 의의가 납득된 적 없었던 것 같다. 이유도 대가도 없이 선물을 주는 외국인 할아버지… 그런 게 왜 있지. 그깟 울음 좀 참으면 무엇이든 원하는 선물을 주겠다니, 눈치 빠른 꼬맹이가 뭘 바랄 줄 알고. 급부와 반대급부 간 불균형이 현저하다. 성 니콜라우스 씨는 계약서 쓸 때 반드시 법률전문가의 자문을 구할 것. 무슨 선물이 갖고 싶냐 물으면 시원히 대답 못 한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욕심이 지나쳐서. 지금 갖고 싶은 것은 영영 가질 수 없는 것뿐이다. 금욕이란 행복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쾌락을 거세하는 것이라 했다. 다운스케일 에피쿠로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소원이면 그 내용은 기적이다. 이유 없고 난데없으며 가망 없는, 제 분수와 주제를 한참 넘어버린 행운 같은 것. 염치없으나 또, 기적을 빕니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고서 실눈으로 주변을 본다. 나보다 절실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다시 눈 감으면 더 많은 얼굴 떠올릴 수 있고. 주눅이 든다. 간절함의 경쟁사회로구만. 하늘이 감동하기에 정성은 미약하고, 부름으로 응답받기에 기도 소리 개미만 하다. 닿지 않겠지. 기적이 존재한대도 내 순서는 한참 뒤일 테다. 기적에도 상도가 있다면 간절한 순서대로 배분되어 마땅할 것 같다. 그런 경쟁에서 내 차례가 영영 오지 않는대도, 그 편이 공정할 것 같다. 신이 있다면,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이 누군가의 설계 아래 있다면, 적어도 최소한의 정의 위에 세워진 것이기를. 쓰고 보니 기적을 무슨 아파트 분양권쯤으로 여기는 모양새다. 불경죄려나. 이러나저러나 제가 은총 받을 일은 없겠군요. 크리스마스다. 온 세상이 작고 반짝이는 것들로 법석인다. 학창 시절엔 수위 아저씨의 허리춤에서 반짝이던 열쇠꾸러미가 갖고 싶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열지 못할 길이 없는 인도자의 증거이자 표식 같았다. 짤랑짤랑, 행차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이제 가진 열쇠가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키링은 가방이나 스마트폰에 달릴 뿐이다. 지금 집도 버튼식 도어락이고, 덕분에 문단속 없이 외출하는 짓은 더 안 하게 됐다. 혹시 산타가 올 작정이면 창문 안 잠겼으니 참고하라고, 미리 일러둬야 할 텐데… 올해는 오려나. 가난한 내가 사랑도 하건대, 산타가 아니 올 리 없나. 근데 오라는 산타는 안 오고, 기적은 이미 텄다고, 속절없는 눈이나 푹푹 오면 어쩌나. 어쩌긴 뭘 어쩌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메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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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당신의 인생, 바꾸시겠습니까? 자소서 같은 데 진짜로 그런 말 쓰는 사람 있을까. “존경하는 부모님 아래 화목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없겠지. 없어야겠지. 챗GPT도 비추할 도입부라 하겠다. 나는 어땠더라. 항상 부족했지 뭐. 어떤 결핍은 성장의 촉매가 되기도 하겠지만, 지난날의 허기야말로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 운운할 날 온다면 좋겠지만, 그냥 지난날의 진술로서라면, 삶이야 언제나 부족했지. 욕심이 많았으니까. 바람과 결핍이 같은 단어(want)를 쓴다는 것이 늘 재밌다. 항상 지금보다 많은 것, 나은 것을 바라니까 부족하다. 결핍은 끝이 없다. 욕심에 끝이 없는 한. 공무원을 홀대하면 부패가 증가한다는 말이 있다. Becker와 Stigler가 논문으로도 발표한 적이 있고 후속 연구도 제법 많다. 꼭 공무직에 국한할 필요도 없을 것이, 사실 간단한 경제논리다. 필요 수준보다 보상이 부족할 때 합리적인(?) 경제인은 수익의 극대화를 모색하고, 그 방법이 뇌물이나 횡령인 경우 부패로 이름한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필요고 어디부터 욕심일까. 안분지족: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알며 만족할 줄 알다. 명심보감의 가르침이되 종종 지나치게 보수적인 구호 아닌가 영 탐탁잖다. 분이라면 이미 넘친 듯도. 주제라면 뻔질나게 넘어온 듯도. 이 욕망이 남의 것까지 탐하게 되면 샘이라 한다. 샘은 새움의 준말이고, ‘새우다’라는 동사가 따로 있다(몰랐다). 시샘하다로 쓰곤 하지만 ‘시새우다’라는 (잘 안 쓰는) 말이 본말이다. 질투와 시기가 비슷해 보이지만 질투는 보다 센 말로, 순우리말 ‘강샘하다’로 풀 수 있다(몰랐다). 질투는 애초 딴세상 사람보다, 자신과 대등하거나 유사한(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 적부터의 통찰이다. 그런 면에서 연예인 혹은 셀럽이란 선망과 시샘의 사이를 오가는 일이라 할 텐데, 최근 금수저 셀럽에 열광하거나 이를 이용해 컨셉으로서의 금수저(?)를 기획까지 하는 행태가 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샘을 건너뛰고 선망으로 직행하기. 선망이 시샘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거리를 벌리기. 그래서 요즘 탑급 셀럽이 되는 데 자수성가 서사보다 ‘그늘 없이 자란’ 듯한 노블함이 주요하단다. 타고나기를 범접할 수 없는 상위계급의 존재가 미천한(?) 나 따위와 소통을 해준다. 아이고. 인생에 그늘 많으면 시원하고 좋(다)던데, 역시 그렇지만도 않나 보오. 남의 삶이 이따금 부럽기는 하지만 굳이 빼앗고 싶진 않다. 뺏는다고 말하니 너무 능동적인 폭력 같아 찜찜했나. 그럼 합의하에 바꾸자면, 바꿀 텐가? 조건은 이렇다. 일부 요소(재산, 재능, 외모 등)만이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교환하는 거다. 경험, 기억, 기질과 가치관까지도. 나열하고 보니 그건 인간이 아니라 세계를 맞바꾸는 수준이긴 하네. 당연한 소리를 길게 했나. 하지만 애초에 ‘일부’만 바꿀 수는 없는 거다. 경험과 가치관이 무관할 리 없고 기질과 재능이 다르지 않을 테니까. 최근에 배우 서현진이 유퀴즈에 나왔고 비슷한 말을 했다. <또! 오해영>의 대사를 빌려서. —난 내가 여기서 좀만 더 괜찮아지길 바랬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되길 바래요. 여전히. 박해영 작가의 대사들 좋아하지만, 새삼 오늘은 ‘애틋하다’가 켕겨서. 그 말이 걸려 나자빠져서. 누군가의 삶, 줘도 안 가질 거지만, 안 바꿀 거지만, 그게 내가 나를 애틋해(까지)해서인가 싶다. 그런 바람 아래는 자기연민이 깔려 있는 듯싶다. 나라도 나를 애틋해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랴. —너는 너가 무섭니? —저는 제가 가여워요. 이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박보영 대사. 세상에 싫은 것 한두 가지 아니지만 특히 자기연민 싫다. 툭하면 이미 하고 있으니까. 항시 그런 유혹에 취약하고, 시작되면 삶은 더 유약해지니까. 생존에 불리해지니까. —남들이 나를 두려워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안나> 수지 대사. 별 상관없는 두 대사가 자꾸 세트로 떠오른다. 내가 나를 가여워할 바엔 남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게 낫지 않겠나. 잘못된 동기부여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나. 생존과 윤리는 언제나 우선순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이다. 시궁에 빠진 어느 날 누가 내민 손 있다면, 그 손은 짐승의 것일까 악마의 것일까.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나뿐이라 함에, 짐승도 악마도 애초에 나였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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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급식실 바닥에 떨어진 깍두기 주워 먹던 애.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 이전으로는 거슬러 가기 힘들다.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라곤 몇몇 파편들뿐인데, 그중 왜 하필 그런 장면인지는 모르겠다. 대개 오래 살아남는 기억은 안온보다 치욕이긴 하겠다만. 당시엔 일주일에 한 번 ‘잔반 없는 날’이란 게 있었는데, 초등학생이 아무리 골고루 먹어도 단무지 국물이라든지 다지다 만 마늘 덩어리라든지… 없을 수는 없으니까 한구석에 잔반통을 두긴 했다. 대신 선도부원 같은 6학년 선배들이 그 앞을 지키고 서서 잔반을 들고 오는 후배들을 단도리하는 거였다. 나는 깍두기 몇 조각을 남겼다. 무가 덜 익었던가 너무 익었던가 먹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유가 탐탁지 않았는지 선배는 그 자리에서 깍두기를 다 먹어야만 보내주겠노라 했다. 나는 멀뚱멀뚱 서 있었을 것이다. 먹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나 그때나 부조리에 탐구심은 있되 순응할 마음 없었을 테니까. ‘선배’로서(그래봤자 초딩이긴 하지만) 소위 가오 상하는 것이 싫었을(초딩이긴 하니까) 그와 대치 상태가 길어졌고, 화가 난 그는 작대기 같은 걸로 삿대질하다 내 급식판을 툭툭 치기에 이르렀고, 나는 그대로 급식판을 바닥에 엎어버렸다. 선배가 흥분해 너무 세게 쳤나, 이때다 싶은 내가 부러 던져버렸나. 성정으로 보아 후자였을 것 같지만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엎질러진 깍두기지만, 더 이상 논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고(아무래도 초딩이니까), 선배는 어쨌든 잔반을 남긴 건 사실이니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잔반통이 가득차면 선도부가 무슨 벌이라도 받는 시스템이었을까? 아무튼 그쯤에서 선도부원은 악을 쓰기 시작했고 소란이 길어졌다. 그래서 나는 떨어진 깍두기를 주워 입에 털어넣었다. 그대로 성큼성큼 급식실을 나갔고, 쓰레기통에 깍두기를 퉤 뱉고는 갈 길 마저 갔다. 이후엔 바닥에 떨어진 깍두기 주워 먹는 좀 미친 애가 있다고 소문이 났던 것 같다. 별것 아니었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소문이라도 된 냥 혼자 의식했던 건지도 모른다(아무래도 초딩이니까). 프랜 리보위츠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싫어했던 교장에게 꼬투리를 잡혀 퇴학당한 후, 생계를 위해 택시기사 청소부 등 이것저것 하면서 포르노도 썼다. 포르노소설의 필명으로 교장 이름을 썼다고 한다. 앤디 워홀이 창간한 잡지 『인터뷰』에 미팅을 하러 간 날은 노크를 했더니 누구냐고 물어서, “발레리 솔라나스”라고 답했다. 앤디 워홀이 총에 맞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고, 발레리 솔라나스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인간의 이름이다. 리보위츠는 좀 미친 사람인 듯하고, 나는 제법 미친 것 같은 그의 미국식 유머를 좋아한다. 그의 주요 업무(?)엔 두 가지가 있는데, 담배 피우기랑 복수를 계획하기(plotting revenge)다. 썩 마음에 든다. 특히 복수를 시행(take)하는 게 아니라 계획(plot)한다는 점이. 노자에게 복수란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올 때까지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 걸린다고 하는데, 10년이나 강물만 보고 있자면 너무 지루하지 않나. 역시 인류의 무료함이 이야기를 낳았으려나. 복수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고 새로 쓰는 일이라면 10년쯤 거뜬할 것도 같고. 도파민은 복수극이 최고다. 그래서 동서고금 복수극이 숱하게 만들어진 것이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복수 행각엔 크게 흥미가 없다. 그것도 다 삶에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지, 시행하지도 않을 계획에 무슨 재미가 있다고. 그래도,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셈이라 하니까, 내 안에 도서관급은 못되어도 절반쯤 차고 절반은 텅텅인 서가 정도는 늘어서 있겠고, 어딘가에 치부책도 한두 권쯤 꽂혀 있지 않겠나. (브리태니커 대백과 규모일 수도 있긴 한데.) 살면서 어떤 치욕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치욕을 안긴 이의 미간에 총구를 겨누는 상상보다 내 관자놀이에 (실제로) 손가락 총을 겨누는 일이 더 잦다. 가끔은 두 손가락 총구를 입 안에 넣기도 한다. 탕.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 그만. 그런데 요즘은 버릇이 좀 바뀌어서,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손으로 내 목울대를 잡게 된다. 엑. 그만 죽으시오. 그치만 목을 죈 손은 지나치게 따뜻한 것이다. 경동맥의 박동도 잘 느껴진다. 흠. 쉽게 죽진 않겠군요. 그냥 오늘 문득 그 손, 자해가 아니라 삼키지 못하게 하려던 거였나 싶어서. 치욕, 뱉으시오. 담아두지 마시오. 바닥에 떨어진 깍두기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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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깨워줬으면. 자주 졸리다. 그야 잠을 제대로 안 자니까. 간밤에는 잘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다. 꿈결에 들었으니 내가 내게 한 말일까? 그래, 아무튼 푹 자자. 긴 잠이면 좋겠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깨워줬으면. 그땐 일어나야지. 그런 일도 일어나야지. 그때까지 나 대신 살아주라. 멸망은 내가 할게. 나머지 모든 삶은, 누가 대신? 꿈속에선 편지가 많이 왔다. 봉투를 열면 그렇게 쓰여 있다. 당신의 절망을 빕니다. 그런 편지가 30년 동안 매일매일 왔다. 참으로 무성의한 가운데 꾸준함이다. 꿈속의 나는 매일 아침 그 편지를 확인하고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버렸다. 30년 동안 매일매일. 참으로 꾸준한 무신경함으로.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 보지 마세요. 쇼츠고 웹툰이고 보지 마시고. 칼빙, 빙하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 틀어놓고 눈을 감으세요. 나사 영상 같은 걸 재생하면 영혼이 우주로 갑니다. 눈을 꼭 감으세요. 하지만 나는 눈이 가벼운 사람. 유혹에 취약하며 번번이 실눈을 뜬다. 당신의 멸망을 빕니다. 그런 문장이 번쩍 보였다면, 이건 광시증일까 비문증일까. 눈 비비면 난시에 안 좋다는데 자꾸 눈 비비게 된다. 눈 감아도 보이는 번쩍임을 안내섬광이라고 한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도 초거대 화산이 폭발해도 미국과 러시아의 핵폭탄이 일제히 떨어져도, 멸망의 순간에 언제나 거대한 빛이 있다.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자꾸 빛이 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인가 보다. 벌써 30년이 흘렀는가 보다. 그간 누가 나 대신 살았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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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뭔갈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본데… 라고 말하다가 문득 착각을 어쩌다 단단하게, 하게 되었나 싶다. 깨지지 않는, 너무 완고해서 틀어질 염려 없는, 그러나 이미 그릇된 신념 같은 것을 그려볼 수 있겠다. 아주 대단하고도 단단한 착각. 물론 삶이 다 착각이지 뭐. 일체유심조라, 화엄경의 가르침 아니던가. 이런 소리를 할 때면 홀로그램 우주론도 생각나고 통 속의 뇌도 생각나고. 물론 나는 한번 꼬아둔 밈을 훨씬 좋아한다: 우리가 만약 통 속의 뇌가 아니라면? 미친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현실이고 우리가 실시간으로 인생을 조지고 있는 거라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이건 들뢰즈의 말이고 이 말을 참 좋아한 정성일 평론가가 자신의 평론집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이제는 ‘영화’가 그 환유로 쓰일 만큼 상징적인 입지에선 내려온 것 같지만, 아무튼 종국에 세상은 이야기가 되든가 이야기만 남든가 할 것이다. 남는 건 사진 아니라 기억뿐이고, 그 기억이란 건 내구도도 보존력도 나쁜 생체 저장소에 남는 것이고, 기억은 애초부터 불완전하게 현상된 필름이고, 기록할 때 한번 복기할 때 한번, 그리고 그 사이에 무수히, 착각의 연쇄와 함께 촤르륵 영사되는 이미지다. 그러니까 사는 건 아주 슬픈 거야. 삶 대신에 슬픔을 채워넣고 있으니까. 사는 게 시시해지면, 어느 천변에 하릴없이 앉아 종일 흐르는 물을, 흐르는 시간을 보고 있는 양치기처럼, 언제부턴가 중얼중얼 혼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삶을 조달한다. 즐거운 이야기보다 슬픈 이야기를 만들 때 훨씬 재미가 있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슬픈 삶을 끝도 없이 만들어낸다. 등장인물은 오로지 슬픈 나. 나의 슬픔.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슬퍼한다. 삶 대신에 슬픔을 조달하고, 슬픔을 자족한다. 어느 때에 눈치 빠른 사람들이 나의 슬픔에 증빙을 요구한다. 너 가짜로 슬프구나, 진짜 슬픈 게 뭔지도 모르는구나, 진짜도 아니면서, 시시하네. 슬픔의 입증을 요구받은 나는 궁지에 몰리고 또 궁색하여 슬퍼진다. 삶이고 이야기고 다 시시하여 궁여지책, 만든 슬픔이건대, 가짜인 바에 결국 더 시시한 것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10년도 더 전에, 나는 하와이에 있었고 23인치 캐리어에 겨우 담는 슬픔을 이고 지고 끌었지. 한 달여 머무는 동안 슬픔은 더 자라서, 증식해서, 캐리어 하나로는 도무지 모자라서 로스에서 90% 할인하는 21인치 캐리어를 하나 더 샀어. 체류 경비는 다니던 학부에서 댔는데, 수업 듣기 싫어서, 낮 시간 다 빼먹고 오아후섬의 동안을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곤 했어. 트럭에서 파는 새우도 먹고. 카일루아 비치에서 바다거북의 알껍데기나 맨손으로 바스러뜨리고. 해변에서 한 블록쯤 들어가면 돈 많은 미국인들의 별장이 줄지어 있지. 허리께밖에 안 오는 담장을 넘보기란 무척이나 쉽고, 커튼이 반쯤 열린 거실에 한 여자가 웅크려 있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옆구리를 부여잡고서. 그리고 천천히 고꾸라지지. 뭘 잘못 먹었나. 맹장이라도 터진 걸까. 플루메리아 꽃무늬가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아니 그게 꽃이 아니었나, 천천히 번지는 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아직도 고래 좋아하냐? 이건 처음 학사경고 받고 면담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의 질문. 고래를 좋아하기야 하지만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이었는데, 대충 내가 하와이에서 수업 제대로 안 듣고 밖으로 돌았던 게 혹등고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소문이 났다 했다. 고래 탐사를 다니느라 공사가 다망한 열정 탐험 소년 같은 전설이 생겼나보다. 고래를 만나고 말겠어! 하고 떠난 기억은 없으나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저 멀리 브리칭하는 고래 몇 마리를 본 적은 있다. 그랬나. 확신이란 없는 거다. 슬픔과 고래는 다른가. 거대한 슬픔과 조그만 고래를 구별할 수 있나. 나는 바다로 돌아간 슬픔을 만났나. 끝끝내 만나지 못했나. 그때 나는 참 슬펐는데.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종국엔 다 기억인 척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내가 하와이에 있긴 했는지. 그때란 게 있긴 했는지. 그나마 사진이 남아 있으니까 나로서도 믿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슬픔은 다른 문제다. 사진에는 슬픔 같은 것 없으니까. 이야기도 없으니까. 그때 그냥 사느라 다 시시해서 죄 급조한 슬픔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래. 다 시시하고 또 슬프지. 물론 머잖아 믿을 수 없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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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우리집도 파묘했단다. 증조할아버지 산소 얘기다. 아버지도 몰랐다고 한다. 선산이 따로 없어서, 할아버지 묘는 그래도 ‘우리땅’에 있지만 증조할아버지 봉분은 남의 임지에 있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 임야가 지목이 변경되어서 개발을 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 종가에서 결정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벌초하러 들렀다가 있어야 할 묘가 사라진 광경을 목도했다고. 나한테야 3대 올라간 증조할아버지지만 아버지한텐 할아버지니까 그리 멀지도 않다. 적잖이 황당했겠지만, (우리 아빠 늘 그렇듯) ‘그러고 보니~’ 하는 식으로 별 대수롭지 않게 소식 전했다. 엄마는 집안에 흉 들까 걱정하고, 나는 100년 봉분이면 족하지 자손에 해코지하는 조상이면 그게 신이냐 악귀지 그랬다. 조상도 악 쓰면 퇴귀해야 한다고 했다. 제법 불효자손스러운 발언이지만 자주 하는 소리라 엄마아빠는 반응도 잘 안 한다. 만신이고 목회자고, 종종 신의 뜻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리겠냐 하지만, 인간이 죽어서 된 것이든 인간이 발명한 것이든 인간이 매여 있는 무엇이든, 아무렴 인간에게서 비롯된 신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없어도 우주는 있겠으나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 인간 없는 세상에 인간이 만든 신이야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신의 마음을 어찌 알겠나 할 때 열 길이고 한 길이고 사람 마음 또한 모르겠어서 하는 소리다. 이런 얘기를 합천 한우축제에서 사 왔다는 소고기를 먹으면서 했다. 생각보다 축제며 장이 아주 컸다고, 사람도 무지 많았다고, 사흘 축제에 소를 백 마리나 잡았다고 했다. 와 그럼 소들한텐 축제가 아니라 대학살이네, 채끝살 먹다 말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가족들도 다 들었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신장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대로 군대 자체를 의인화한 군웅신은 고기와 술을 좋아한다. 이래서야 만신은 자기 신념대로 살기가 어렵다. 무당이 비건이어도 군웅거리 할 때는 고기(그것도 생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칠성장군이나 불사할머니를 청할 때는 부정 타니까 함부로 피 봐서도 안 된다. 그래서들 만신을 그릇이라고 한다. 만신도 무당도 어원은 순우리말이지만, 만신을 음차할 때 滿身으로 한 데 그런 이유도 있겠거니 싶다. 실어서 채우고 또 비우는 몸이자 그릇. 그러해서 만신들이 후학을 두거나 훈육할 때 자주 하고 또 첫째로 꼽는 것이 이 점이다. 제자는 신의 말씀을 청하여 듣고 헤아리는 인간일 뿐, 스스로 신이 된 냥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결국 다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이야기들뿐이다. 나도 별수 있나,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을 넘어설 일은 없다. 죽을 때까지 인간일 거고, 사람 사이 부대끼며 살 거고, 신이 존엄하다면 그것이 기원한 인간 또한 존엄함을 끝없이 상기해야 할 테다. 그 믿음이란 게 쉽게 나약해지니까 더더욱 거듭해야 할 거고. 인간에 대한 믿음. 잃으면 찾아야 하는 것. 없으면 빚어야 하는 것. 신처럼. 인류애라 말할 때마다 이상하다. 인간과 인류가 다른 층위라 그런 걸까. 누군가를 보며 인류애를 느껴본 적은 없다. 인류라는 추상의 범주를 실감해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인류애. 잃었다고 말하기는 쉬운 것,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는 것. 내 안에 존재한다고 확인된 적 없고, 그럼에도 아직, 아직은 남았으리라 믿는 무엇. 주절주절 쓰다 보니 언젠가 이런 소리를 또 한 적 있는 것 같아서, 아니 맨날 해온 소리인 것 같아서, 아이폰 메모장을 뒤졌고(검색했고) 이런 메모가 있다. - 인간이 신을 만들었고, 신이 구원을 만든다. -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무엇이다. - 구원은 절망을 만든 손에서 비롯한다. 메모는 메모라서 지금에 와서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과거의 내가 미래—그러니까 지금의 나에게, 그것도 아주 급히 보내느라 휘갈겨둔 전보 같다. 그리고 다음 메모도 같은 맥락인 듯한데(쓰는 어휘가 거기서 거기니까) 실제로 이어지는 내용인지, 별개의 메모인 만큼 별 관련 없다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 “〇”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〇”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큰따옴표는 아무래도 이 자리에 뭘 넣어도 상관없다는 뜻인 것 같다. 멋 잔뜩 부린 것치고 논리가 있는 문장도 아니고. 아무튼 2020년의 나는 〇의 자리에 시를 넣어뒀다. 어떤 믿음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나, 없나.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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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 벌써 시월이네. 이따금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런 거 빌고 있는 사이에도 시간은 한눈파는 나 지나쳐 벌써 저만치고 후딱이다. 나는 언제나 시간의 뒤통수만 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얼굴 한번 뵌 적이 없네요. 무심하기도 하지. 시간은 한 번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사주든 신점이든 피할 수 있는 게 있고 피할 수 없는 게 있다고 한다.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지만, 그중 뒤에서 날아와 피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란다. 그렇담 미리 일러줄 터이니 재주껏 피해보라 하는 게 운명인 셈인데, 글쎄, 운명이 다 뭔가, 살면서 앞에서 오는 화살 같은 것 눈 마주쳐본 기억 없다. 나는 3차원의 인간이고 다 시간축 그래프 위의 삶이고 운명이고 숙명이고 다 시간의 일이니 언제나 뒤에서 날아와 내 뒤통수 뚫고 저만치 갈 뿐이다. 뒤에서 출발한 주제에 언제나 나보다 빠르더이다. 그래서 시간은 쏜살같지요. 그치. 쏜살이지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류시화 시인이 그랬는데 사실이 아니란다. 새도 돌아본다. 돌아보지 않는 건 화살 그리고 화살 같은 시간. 고개 돌리는 건 날아가던 새 그리고 날 줄 모르는 나. 나만 자주 돌아본다. 새 쫓던 개처럼 보고 있다. 나 대체 뭐하고 살았니. 지나온 자취를 그려보면 인생 곡선이라고 하나, 삶의 궤적에 고저도 있고 너울도 있다. 그래서 인생 굴곡진 것이라 하는군요. 인생 직선 같은 건 역시 없군요. 운때니 대운이니 하는 개념 또한 그러해서 들삼재 날삼재 하는 것이다. 모월 모일 00시 00분 00초 뿅 하고 바뀌는 것 없다는 세계관이다. 스윽 들었다가 스윽 나는 것.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언제나 디졸브. 인생은 곡선. 굴과 곡 있고 절과 직 없고. 이산점 없고 특이점 없고 미분 불가능한 지점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 지난 일을 복기하는 게 다 적분인가 싶다. 그 값이 제 인생 성적표인가요. 가로축이 시간이고 세로축의 고-저가 좋고-나쁨이긴 하니까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아하. 면적을 키웠어야 하는군. 가로축 시간은 내 몫 아니니 세로에서 고점 찍었어야 하는군. 돌아본대봤자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남는 건 기록뿐이다. 9월 휴가의 기억도 벌써 시간이 낚아채 저만치 가고는 없다. 참 빠르지. 벌써 뵈지도 않네. 휴대폰 앨범에 사진만 남았다. 전생의 일 같다. 이게 내 기억이 맞나, 어쩌면 이것은 주입된 기억, ‘나’는 사실 김동휘의 치료용 장기를 생산하기 위한 클론일지도, SF적인 의심이나 하고. (<미키17> 예고편 재밌게 봤나봄. 봉준호 오징어게임 손흥민 한강 레쯔고.) 8월에는 기록 몇 개 있다. 영주 전시 서문 썼고. 밀리의서재 유튜브 나가서 에세이 올타임 레전드 추천했다. 역시 운명이란 뒤통수에나 대고 외치는 것인지라, 지나고야 하는 생각으로다, 올타임을 내가 어찌 알겠나. 미래의 내 마음 나도 모르오. 시간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오. 출판문화도 8월호였고 실은 글에서 똑같은 얘기나 하고 있더라. 시간 참 빠르지요. 7월까지 가볼까 하다가 말았다. 거슬러 가는 내내 보인 것 뒤통수뿐이어서. 9월의 나도 과거나 보고 있었나보다. 8월의 나도 그랬나보다. 과거의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뒤통수를 보고 있는 뒤통수를 보고 있는 내가 있다. 반대로 고개 돌리면 시간의 뒷모습만 있을 따름이고. 좌고우면. 두리번두리번. 좀 더 가면 있으려나. 나랑 눈 마주칠 과거의 내가. 그때는, 한때는 미래를 보고 있었을 내가. 만져보면 내 뒤통수 절벽이다. 뒤통수만 하도 봐서 닳았는가 한다. 두상도 관상도 과학이라 그 또한 팔자라고도 한다. 엄마는 갓난쟁이였던 내가 하도 순해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동그란 두상을 위해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해줘야 하는데, 나를 똑바로 눕혀두면 몇 시간이고 그렇게 멀뚱멀뚱 있다 울지도 않고 잘 잤단다.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것 있다가도 없는 것이어서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만 누워 한참을 뭘 보고 있었니. 더 먼 과거를, 전생이라도 보고 있었니. 아직 먼 미래를, 지금의 나를, 아니면 네 마지막이라도 보고 있었니. 갓난 내가 본 것도 온통 뒤통수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방금 태어난 우주먼지가 겪기엔 참으로 외로운 일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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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성격이 팔자다. 사주팔자 정해진 대로 성격도 나는 것이라면 운명론이고, 팔자가 다 무슨 소용인가 성격따라 팔자도 만들어가는 것이라 읽으면 자유의지의 몫이 (조금은) 남는다. 어느 쪽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타고나는 것은 기질이고, 성격은 이 기질에 교육 환경 원칙 신념 기타 등등이 붙어서 만들어진다. 만든다는 건 조소(sculpture) 같은 것이어서 깎이는 것도 덧붙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타고난 것─기질을 팔자라 불러야 정확할 것 같지만… 성격이 팔자라는 말 자꾸 생각하게 된다. 타고난 데 무엇은 깎고 무엇은 붙이는 일. 오랜만에 공수 받고 왔다. 법당이든 예배당이든 신당이든 기도하는 곳은 대개 텅 비었고 대체로 충만하다. 신령한 것들은 쌓이고 잡다한 것들은 날린다. 정한 것들을 추리고 흉한 것들을 버린다. 만신의 어머니는 황해도 실향민이었다고 했다. 다섯 살 때 신병을 앓았고, 어머니가 동향, 그러니까 황해도 출신의 무당을 수소문해 내림굿을 받았다. 영웅설화 같은 이야기가 제법 있는데, 그중에 신병으로 죽다 살아난 다섯 살, 어머니에게 “산에 가야 한다, 안 가면 죽는다” 하더니 지게에 업혀 오른 산에서 땅에 묻힌 탱화 열다섯 점을 파낸 일화가 있다. 만신의 지금 신당은 단독주택의 방 한 칸이고, 두 벽면을 가득 채운 탱화들 중 그때 캐낸 그림도 있다. 손대면 바스러질 것처럼 삭은 그림이 다른 탱화들과 다를 것 없이 섞여 걸려 있다. 주택은 언덕 끝, 북한산 둘레길의 입구를 알리는 푯말 바로 옆에 있었는데, 터 물론 좋고 해가 잘 들었다. 형체 하나 알아볼 수 없이 곰삭은 그림에도 낮은 해가 들었고, 안 흉했고 따뜻했다. 만신에게 할머니 얘기 들었다. 친가 외가 조부모님들은 다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노인의 품 같은 것, 뺨을 대면 나는 냄새나 이마를 덮은 손의 촉감 같은 것은 모른다. 마주앉아 얘기를 듣는 내내 만신의 등 뒤에 걸린 탱화를 봤고, 내 기억에도 할머니가 있었다면 저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흙냄새가 나려나. 아마 그럴 것이다. 엄마랑 통화하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어, 물었다. 할머니는 집에 두었던 신단을 생전에 정리했다고 했다. 만신이 늙거나 하여 하직하고 신령들을 물릴 때는 정중히 퇴송굿을 해야 한다는데, 그런 거 응당 했으려나, 혹은 당연히 안 했으려나. 수화기 너머 다 들으면서 아빠는 별말이 없다. 이소(@lisao_in_china )님 인스타에서 재밌는 글 봤다. 중국 지인의 이야기인데, 어릴 때 몸이 아프거나 하면 사주의 오행 중 부족한 것을 골라 그에 맞는 자연물을 수양부모로 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지인은 목이 부족해 계화나무를 수양아버지 삼았다고, 그러니 세상 모든 계화는 자신의 친척이라고. 말마따나 참으로 낭만적인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다. 아이팔기. 자식의 사주가 나쁘거나 부모와의 궁합이 맞지 않을 때, 사주에 맞는 지인 혹은 친척, 그러니까 진짜 사람을 수양부모 삼기도 하고, 중국의 저 이야기처럼 개천 바다 산 바위 신령목 등에 팔기도 했다. 판다고 해서 인신공양은 물론 아니고, 자연물에 실타래나 명다리 같은 것을 걸고 제를 올린 다음 때마다 부모에게 문안 올리듯 찾아뵙고 절하고 그런 풍속이다. 그렇게라도 자식이 오래 살기를, 병 없이 무탈하기를 비는 부모의 마음. 아이를 누구에게 무엇에 팔아서라도. 우리 할머니도 같았겠지. 아빠도 그랬겠지. 할머니 얘기를 좀체 안 해주는 아빠지만, 나에게 중한 일이 있을 적이면 때마다 할머니가 아빠 꿈에 나왔다고 했다. 중한 일이라는 건 독립할 때 대학 갈 때 첫 취직할 때 등등.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손자를 여전히 걱정으로 살피는 할머니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래 묵어 콤콤한 책 냄새 같은 게 생각난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대화가 안 되니까, 차라리 아주 들리면 좋겠다, 웃긴 얘기긴 한데, 말이 안 통하니까, 내가 만신에게 말했고, 그게 보이고 들리면 어디 좋은 거게요, 웃으면서 답해줬다. 아빠 꿈에 할머니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내 꿈에는 할머니가 나온 적이 없다. 다만 혼자 살다 많이 아팠을 때, 가위까지 눌려 꼼짝 못하는 내 이마에 땀 닦아주던 어떤 손이 있었다. 흙냄새 같은 게 났던 것도 같다. 그러게. 그렇게 아팠던 적도 있었네. 그렇게 많이 앓은 지도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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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