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두 번째 산문집을 소개합니다.
‘혼자’를 견디는 단단한 힘. 『좋아서, 혼자서』 이후 6년. 저는 여전히 ‘혼자’ 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철학과 미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세상은 훌쩍 달라졌습니다. AI의 속도로 질주하는 세상 속에서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는 쓸쓸함이 밀려듭니다.
다행히 저에겐 글과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진화와 일의 풍경을 관찰하고, 일과 일이 아닌 일을 동시에 조망하며 ‘멈춤’의 태도와 ‘간격’의 미학을 배웁니다. 시대에 맞서거나 타협하지 않고 ‘일상의 철학’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일을 사랑하면서도 일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자유를 꿈꾸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독립적 존재들을 위한 생활철학 산문집. 속도를 따라가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위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문집.
[멈춰서, 혼자서]를 그 누군가에게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윤동희산문집 #멈춰서혼자서 #좋아서혼자서 #북노마드
나의 보폭과 나의 속도로
경계 없이 자유롭게
단순하고 경쾌하게
혼자,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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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저의 첫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2020년 1월 3일 서점에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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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혼자서
윤동희 산문집
달 출판사
#좋아서혼자서 #좋아서_혼자서 #윤동희산문집 #달 #달출판사 #나혼자일한다 #이희은그림
1. 좀처럼 생방송으로 TV 채널을 보지 않는 시대에 <유퀴즈>를 보았다. 제주에서 시를 쓰는 소년 ‘민시우’ 편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울었다.
2. 제주, 바다, 애월의 숲,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난 엄마… 하루는 끝이 있어, 영원은 끝이 없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엄마와 ‘시’로 약속한 소년의 이야기에 훌쩍훌쩍 소리 내어 울었다.
3. 그저 울음으로 소년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을 섭외해 ‘책’으로 연결시켜야지, 라고 생각할 것 같은 양아치 출판업자들이 생각났다.
4. 나는 소년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 1999년, 영화 <벌이 날다>를 보고 당시 일하던 <월간미술>에 짧게 소개글을 남겼더랬다. 미술인들이 꼭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5. 아무리 짧은 단신이더라도 모든 취재를 ‘몸’으로 하던 시절, 한 컷의 스틸과 몇 줄의 기사와 리뷰를 쓰기 위해 직접 만나고, 보고, 찍고, 대화를 나누었던 시대.
6. 지금처럼 ‘검색’하고 ‘긁어서’ 릴리스할 수 없는 시대에 기자로 일해서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믿는다. ‘몸’으로 마주한 사건은 철저히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7. “미술 잡지에서요?” 당시 영화 홍보 관계자의 의문 섞인 질문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반가운 환대도. “맞아요, 미술 잡지에 소개될 만한 아름다운 영화예요.”
8. 그로부터 24년 후, 감독은 ‘유퀴즈에 소개될 만한 아름다운 아들’로 우리에게 안부를 전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인사였다. 어쩌면 슬픔은 본래 아름다운 건지도, 아름다움은 본래 슬픈 건지도.
가급적 ‘비자본주의’적으로 살고 싶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은 하루 만 원으로 버틴다.
검정 재킷 두 벌, 검정 티 두 벌, 흰 면티 두 벌, 검정 바지 두 벌로 살아간다.
올해 봄, 베이지 재킷을 하나 들였다. 살까 말까, 여러 날 고민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입은 속옷과 셔츠를 손으로 빤다. 다음 날 마르는 동안 여분의 한 벌을 꺼내 입는다. 매일 새 옷이다.
비 내리는 저녁, 을지로에서 모처럼 제법 마셨다.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그날 입은 속옷을 내 손으로 빨 수 있으니 취한 게 아니다. 〈나의 아저씨〉 정희의 독백처럼.
- 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 4월, 5주 동안 이어진 #서울시민대학 @seoulopencityuniversity <인생 편집> 강의를 잘 마쳤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제가 더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푸코는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고대 그리스로 시선을 돌렸다.
권력을 해부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한 건 개념의 완성이 아니었다. 새로운 질문이었다.
- 어떻게 하면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가.
푸코는 2,500년 전 소크라테스의 언어를 소환했다.
- 너 자신을 돌봐라.
나는 누구인가? 푸코는 아는 것만으로는 인생을 변형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MBTI를 알아도 인생은 달라지지 않듯이.
그럼 무엇이 나를 바꾸는 걸까?
’자기 돌봄‘이다.
푸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끄집어냈다. 황제는 저녁마다 하루를 점검했다. 자책이 아니었다.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계속되는 단련이 그를 돌보았다.
자기계발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자기 돌봄은 그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아무도 묻지 않아도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이 결국 삶을 편집한다.
* 안녕 동북카페 @hello_bookcafe <월간 미술사>. 모히토와 꽈배기와 일본 과자를 함께하며 쿠르베와 마네를 공부했습니다.
마네는 죽기 직전, 아스파라거스를 그렸다.
매독이 다리를 잠식해 들어오던 인생의 마지막, 그는 손이 닿는 거리의 사물만 그릴 수 있었다. 세계는 극도로 좁아졌으나 그림은 그만큼 깊어졌다.
알라 프리마(alla prima), 단 한 번의 마무리. 마네는 유난히 빠른 붓질로 그림을 채웠다. 오래 보았기에 빠르게 그릴 수 있었음을 세상은 알지 못했다.
젊은 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본 마네는 깨달았다.
멀리서는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 덩어리로 일렁이는 그림의 비결은 30여 년간 보았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날 이후, 그는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되었다.
세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향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평생 반복해서 그렸다. 유화 44점, 수채화 43점, 87점을 그렸다. 산의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보는 행위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세잔은 산을 그릴 때마다 처음 보는 듯 보았다. 어제의 산과 오늘의 산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바라보지 않는다. 찍고, 업로드하고, 떠난다.
멍하니 정신을 잃는다는 뜻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 쓰이는 망연자실(茫然自失)의 망(茫)은 ‘바쁘다’는 뜻이다.
‘보는’ 일은 ‘하는‘ 일을 멈추는 데서 시작한다.
북노마드 * 스페이스 더 파란 ’고전 읽기‘ 독서 모임
- 혹시... 저와 함께 ’고전‘을 읽는 건 어떠세요?
- 4월 한 달, 열한 분과 함께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영혼‘을 이야기하는 [파이돈]을 읽었는데요.
- 5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스승의 이데아를 넘어서려 했던 제자의 윤리학, 관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덕을 쌓는다는 것의 의미.
(1)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2) 행복은 느끼는 것인가, 이루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했습니다.
방식은 같습니다.
책을 읽고 → 카카오톡 단체창에서 주 1회 진도를 확인하고(문의사항은 제가 답하고~ 어찌나 친절하던지...) → 5월 말 @space_the_paran 에서 제가 강의로 마무리합니다.
댓글이나 DM으로 편하게 문의주세요. #북노마드독서클럽 #스페이스더파란 #니코마코스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파도는 바다의 일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과 느끼고 소통하는 ’택산함(澤山咸)’의 시기를 지나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천산둔(天山遯)’으로 건너온 지 10여 년이 되었다.
천산둔을 살핀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산이 있다. 하늘은 멀어지고 위로 올라간다. 산은 멈춰 있고 자리를 지킨다.
세속의 가치에 몰두하는 소인들의 번잡거림과 거리 두기. 둔(遯)은 물러남과 숨음과 피함이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곧 나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젊고 유능한 자들이 ‘사양’하는 대표적인 사양 산업임을 직감한 걸까. 몰락을 직감하면서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출판인들의 결의가 곳곳에 울려 퍼진다.
몰락에도 방식이 있다.
(1) 네트워크 출판: 담합, 유통 구조, 정책, 단체 행동
(2) ( ) 출판: 고립, 소규모, 소실점, 지속
네트워크 출판은 거시적이고 산업에 치중한다. (2)는 미시적이고 비(탈)산업적이다. 누군가 (2)에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 아둔한 내 머리로는 마땅한 네이밍이 떠오르지 않는다.
네트워크는 산업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과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창억떡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업계’를 고민하는 소수에게 ‘좋아요’를 남기고 자신의 매출과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넘쳐난다.
도서전 사유화? 그럴수가! 그리고 도서전에 책을 팔러 나간다. 나의 출판을 위해 애쓰는 당신, 부탁해요~~~ 이덕화 같은 자들이 지천이다.
미술에서 출판으로 건너온 나는 늘 미술의 ‘소실점’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소실점은 결국 사라지는 점이다. 애써 발돋움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유다. 거대한 파도보다 잔잔한 물결에 자족하는 이유다.
진리는 묶이거나 거칠 것이 없다. 활발발(活潑潑)하다. 멈춰 있으면서도 멈춘 줄 모른다.
작은 파도면 또 어떤가. 파도는 바다의 일인데 말이다.
1. 지인은 늘 바쁘다. 지역의 크고 작은 이벤트마다 그의 얼굴이 보이고, 손에는 읽지 못한 새 책이 들려 있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지자체에서 수주한 인쇄물 시안이 수북하다. 직원들의 급여를 책임져야 하는 로컬 비즈니스 운영자의 숙명이리라.
2. 그는 가끔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언젠가는 책 을 쓰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다음으로 유예된다. 유행을 쫓고 네트워킹에 몰두하는 사이 고유한 문장은 휘발된다.
3. 주말 아침, 나가오카 겐메이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꾸준히 발신하는 콘텐츠의 기준. 꾸밈도 가식도 없는 담담함, 주말에 어울리는 글이다.
4. 해당 분야에서 조금이라도 알려진 사람이 되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진지하게 책을 쓰는 것이다. 책을 쓴는 행위는 외부로 분산되는 시선을 거두는 일이다. 나와 마주하는 일이다.
5.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고 믿으며 밖으로 나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성장이 아닌 ’성숙‘에서 온다. 성숙은 혼자 있는 시간을 요청한다. 텅 빈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 생각을 정돈하기, ’멈춰서, 혼자서‘다.
6. 유행하는 이벤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비슷한 곳을 향해 달려갈 때 멈춰 서서 글로 옮기는 사람이 고유함을 만든다. 그 고유함이 이벤트가 된다.
7. 책을 쓰고 싶다는 말은 분주한 군중 속에서 빠져나와 나만의 ’소실점‘을 찾고 싶다는 고백이다.
’나는 지금 나를 소모하는가, 나를 기록하는가.‘
주말 아침,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궁극의 프레젠테이션은 프레젠테이션이 필요 없다”는 말을 믿는다.
발표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강의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갖가지 AI와 디지털 도구를 무기 삼아 기록하느라 여념 없는 사람들의 니즈를 무시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 공부에 전념한 모범생들은 사회가 원하는 대로 조금 높은 연봉에 만족하며 일잘러로 30대를 헌납한다.
그리고 월급에 의존한 여가와 휴가로 영혼 없는 불평을 일삼다가 다음 직장 정도는 찾을 수 있는 나이를 믿고 이직과 퇴사를 널리 알린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했던 시대는 구닥다리가 되었다. 모두 브랜드가 되고 싶은 시대에 드넓은 세상을 원근법으로 고정해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오프라인에는 ’좋아요‘와 ’구독‘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궁극의 브랜딩은 브랜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의 끝에서 브랜드를 외치지 않아도 브랜드가 되는 것,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높은 경지, 언브랜딩(unbranding)이다.
일본에 ’로컬 캐릭터‘ 붐을 이끈 미즈노 마나부는 이를 가리켜 ’팔리다‘라는 간결한 단어로 압축한다.
어떻게 하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렵지 않다. 브랜딩을 ‘잊는’ 것이다. 처음 마음에 품었던 목적을 간직하되,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즈노는 이 조용한 태도의 축적이 저절로 ’다움‘이 되고, 그 다움이 저절로 브랜드가 된다고 말한다.
미즈노의 언어는 브랜딩의 교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브랜딩 따위 관심 없는 내게는 읽고 공부한 리소스를 ’강의 같지 않은‘ 강의로 전환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읽힌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몇 장의 이미지 만으로 시간을 채울까. 스피노자 사진으로 생애를 돌아보고, 바다 사진으로 ’실체-속성-양태‘를 설명하고, 바위 사진으로 ‘살아남으려는 힘, 존재하려는 욕망’(코나투스)을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시대다. 그래봤자다. ’기록‘은 노동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언젠가 다시는 보지 못할 ’세상‘을 바라보는 게 낫다.
바라봄의 기준은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소실점을 품는다. 모든 선이 수렴하는 점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자리다.
그러나 그 허구가 없으면 그림은 무너진다. 바라봄이 없으면 강의도, 브랜드도, 삶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소실점을 향해 걸을 때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원근법이 된다.
기록하는 자는 선을 긋는다. 걸어가는 자는 소실점을 만든다. 나는 사라지는 소실점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