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빈

@beee2eeen

영화기자 @cine_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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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30주년 살면서 처음 자의로 두 번 본 영화는 <옥희의 영화>였고, <씨네21> 1556호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데뷔 30주년 대규모 특집을 동료·선배들의 완벽한 도움으로 꾸렸습니다. 무려 40p를 맡겨 주신 편집부에 감사와 양해를 (_ _)... 홍상수 감독님과 국내 매체로는 6년 만에 인터뷰(질문 구성에 도움 주신 gkd, 김병규 평론가님께도 감사를)를 나누기도 하며 홍상수 게임을 만들었고, 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와 기획의 변을 적는 동안 내가 만들었던 잡지의 에디토리얼을 떠올렸으니, 이제 그의 35번째 장편을 기다릴 뿐 +이번 특집은 유독 더, 실물 잡지로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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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ays ago
밝은 미래 이태양 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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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days ago
매주 힘들지 않은 마감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 주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유독 쉽지 않았다. 창간기념호를 맞아 전 세계 전통의 영화잡지들을 만나는 특집 기사가 꾸려졌고, 난 재작년 이맘때 직접 찾아갔던 일본 <키네마 준보> 편집국의 탐방기를 (마침내) 쓰게 되었다. 게시글의 첫 사진은 당시 인터뷰를 끝내고 고양된 상태로 숙소에 돌아가다가 어느 육교 위에서 찍은 장면. 사진팀 카메라를 들고 갔었는데 사무실 내부 사진을 너무 못 찍었던 터라 다시 보다가 살짝 슬펐다. 선배들이 진행하신 <카이에 뒤 시네마> <사이트 앤드 사운드> 기사도 모두 마음 저릿했다. 이 시대에 웬 종이-영화-잡지라니 싶지만, 초-미래에도 여전히 잡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나이트런>의 한 컷과 대사들을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임재철 선생님의 부고 기사를 짧게나마 지면에 올릴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재작년 이맘때 선생님의 소개로 만날 수 있었던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의 추모사를 받게 되었다. 한상준 선생님, 박상백 대표님, 금정연 작가님, 금동현 연구자님 등 선생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동료, 후배분들께서 한창 경황 없으실 와중 보내 주신 추모사 한 글자 한 글자를 도저히 줄일 수가 없어 분량 조절에 실패하고 지면에 간신히 욱여넣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선생님의 작업을 현재화하는 시도를 (티 나지 않더라도) 해보려 한다. 이제 16번째 연재를 맞은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기획엔 바다 건너 에이드리언 마틴 평론가가 원고를 보내 주었다. 꽤 경쾌하고 시의성 있는 글이니 많이들 읽어 주시길. 결과도 결과지만, BTS 컴백 라이브 쇼의 연출자가 누구인지 등을 1959년생 호주 시네필 선생님께 들었던 서신 교환의 과정이 즐거웠다. 서투른 솜씨로 번역하며 한숨 쉬다가 다시금 임 선생님의 노고를 떠올렸다. 마침 이 주엔 BTS 컴백 라이브에 대한 짧은 기획도 구성했고 김도헌 음악평론가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 기사를 쓰며 알았는데 얼마 전 애플 비전 프로가 NBA 생방송에 처음 도전했다고 한다. (미흡한 중계로 NBA 팬들의 욕을 잔뜩 먹는 중) 시대의 격변과 영화의 자리를 새삼스레 다시 묻게 된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슈퍼볼 하프타임 쇼 라이브에 관한 현대적 미장센의 풀이, BTS 라이브 쇼를 말하는 지금 여기의 우리, 이럴 때 영화와 비평과 잡지를 지키려는 이들의 분투가 묘하게 얽히는 듯하여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던 한 주. 주간지의 한 호수 내에서 이러한 (나만의) 상호작용을 내기란 실질적으로 어렵기에, 여러모로 쉽지 않았고 의미 있는 <씨네21> 1550호. 실물로도 얼른 보고 싶구나. 월간지인 <키네마 준보> 최신 호가 1943호인데 계산해 보니 10년 뒤쯤이면 같이 2060호를 발행하게 되더라.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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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nth ago
임재철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재작년 봄 선생님께 하스미 시게히코 특집 기사에 관한 도움을 받으며 몇 달간 자주 연락하고 뵈었을 때, 고생한다며 합정에서 그나마 먹을 만하다는 백반집에 데려가 주신 적이 있다. 이디야커피에서 커피 한 잔도 사주셨다. 이날엔 반나절쯤 함께 있으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다. 괜히 영화 얘기를 했다간 내 밑천이 드러날 것 같아 일부러 피하기도 했고, 선생님도 영화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이래저래 답답해하셨으니 서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었던 듯하다. 급한 것 빼곤 일 얘기도 별로 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웃어른께 사적으로 밥과 커피를 얻어먹은 건 처음이었다. 합정 알라딘이 어디 있는지 둘이 다르게 생각해서 길이 엇갈렸었다. 선생님은 서점이 얼마 전 이전한 쪽에 계셨고 난 없어진 곳에서 10분쯤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반대라고 느꼈다. 전화로 누가 길을 건널 것인지 이야기했고 내가 건너갔다. 대개 카카오톡으로 지도를 공유하여 만나는 요즘에 드문 일이었던 터라 기억이 난다. 이후에 종종 안부를 여쭙다가 작년 봄 어느 행사장에서 한번 스치듯 인사를 드린 뒤로는 긴 연락을 드리지 못했고 뵙지도 않았다. 며칠 전 생신인 걸 알았는데도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어, 얼마 뒤에 전화를 드려야겠다 생각하며 미뤘다. 보실 수 없었더라도 문자나마 드려 볼 걸 죄송하고 한스럽다. 전화하면 요즘 일은 좀 괜찮냐고부터 늘 물어보셨는데 항상 그냥 비슷하다고만 답했다. <필름 컬처>에 관한 이야기도 부끄러워서 여쭙질 못했다. 대학생 때 나름 영화잡지를 내겠다며 지난 영화잡지들의 온 에디토리얼을 도서관에서 뒤적거렸을 당시, <필름 컬처>를 보고 나서 내 수준에 이런 잡지는 못 할 것 같다고 자각했었다. 그래서 내 잡지는 괜히 더 가벼운 것으로 꾸려 보자고 생각했었다. 어제랑 오늘, 미국영화에 관한 어떤 문장을 찾으려 <필름 컬처> 창간호를 다시 읽고 있었다. 왜인지 찾진 못했다. 기억이 잘못되었나 보다. 영화는 영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른 건 따라 하지 못했어도 이 말은 전적으로 믿었다. 언뜻 보면 한계 같지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느꼈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장례식장이라고 한다. 먼 나라의 누군가가 아닌 주변 사람의 부고를 공유한다는 일에 늘 주저했었는데 지금 마음은 잘 모르겠다. 형이 성남 외곽으로 이사한 후엔 분당에 갈 일이 없었다. 내일 오랜만에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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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nth ago
라울 펙과 도 부장 오스카에서 <센티멘탈 밸류>의 요아킴 트리에는 제임스 볼드윈을 인용하며 어른과 아이에 관한 화두, 이른바 교육과 수학의 가치라는 차원에서 꽤 모범적인 의제를 던졌다. 종종 영화는 탁월한(동시에 위험한) 배움의 경로가 된다. 아마 일전에 라울 펙 감독의 영화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제임스 볼드윈의 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을 듯하다. 관련, 다큐멘터리 전문 웹진 <DOCKING>의 2026년 3월호 ‘비평&작가’ 코너엔 지금 시대에 더욱이 주목해야 할 다큐멘터리스트, 아이티 출신의 1953년생 거장 라울 펙에 관한 감독론을 실었다. 미국의 레이시즘에 항거하다가 유럽에서 말년을 맞이한 제임스 볼드윈,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 미국에 발을 붙였다가 끝내 귀환하지 못한 사진작가 어니스트 콜, 자신의 출신을 원망하며 스코틀랜드의 쥐라 섬에서 <1984>를 집필하고 죽은 조지 오웰. 라울 펙은 이 세 명의 인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집대성하다시피 모으는데, 사실 이 아카이브 충동의 방향성이란 대개의 아키비스트가 으레 그렇듯 상당 부분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라울 펙은 일련의 기록 영상을 제시하더라도 관객이 그 이미지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법한 시간도 공간도 주지 않는다. 푸티지는 끝없는 광학적 확대-축소-이동-전환의 좌표 위에서 흐트러지고, 기도처럼 읊어지는 내레이션과 사운드 디자인의 교란이 작중 숏의 길이를 거의 본 시리즈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실향한 이들의 시선, 즉 이해하기도 전에 마주쳤다가 헤어지는 현상들의 이미지. 라울 펙은 망명자로 생을 마친 세 명의 경험을 이러한 속도와 소란스러움의 영화로써 추체험하게 만든 뒤에 조용한 영성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I Am Not Your Negro>(2016), <사진작가 어니스트 콜 Ernest Cole: Lost and Found>(2024), <오웰: 2+2=5 Orwell: 2+2=5>(2025), HBO 4부작 시리즈 <야만의 시대 Exterminate All the Brutes>(2021)까지 근래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들은 본인을 비롯한 이 체험의 직·간접적 참여자 모두를 소진하게 만들고야 말기에, 모쪼록 (가장 무책임한 말이지만) 직접 그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길 권한다. 원고에 적진 못했으나 적어도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I Am Not Your Negro>(2016)와 <야만의 시대 Exterminate All the Brutes>(2021)는 국내 OTT에서 감상할 수 있다. 감독론을 써야 할 때면 사실 그의 작품보다 그의 생애를 더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어 라울 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아이티의 독재 정권을 피해 타국을 돌아다니던 그는, 중년이 되어 고국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으나 또 다른 정치적 이유로 사퇴했다. 이후엔 영화 작업에 몰두 중이다. 그의 거의 모든 인터뷰를 읽어보았을 때 그는 언제나 힘듦을 토로한다. 자신의 처지를 비롯한 이 모든 상황에 지쳐있다고 말하며, 이제는 세계가 도무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 방도마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한다. 하여 <오웰: 2+2=5 Orwell: 2+2=5>(2025)에는 AI와 트럼프를 대하는 라울 펙의 병리적 불안이, 조지 오웰과 <1984> 속 윈스턴이 겪은 신체의 고통과 부패가 도사리고 있다. 원고에는 싣기 어려운 사담이지만, 평소 사람보다 영화를 대하는 일에 익숙한 나에게 감독론이란 기회는 외려 영화로 저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에 더 지난하고, 부끄러운 결과물을 안긴다... 더욱이 부끄럽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은 이상한 기자이기에 누군가를 인터뷰한다는 것의 책임은 적당히 줄어들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종종 너무나 근사한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일종의 수강생으로서 그들의 말에 얌전히 녹아드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에 치른 이신기 배우와의 인터뷰가 그랬기에 다행이었다. <휴민트>의 금태, 그전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의 도 부장 역으로 내게 여전한 미지의 지대인 ‘사회생활’의 이미지를 1초의 표정만으로 알려준 배우인데, 인터뷰 도중에 감히 이런 말을 던졌다. “배우님 말씀 중에 좀 실례일 수도 있지만 정말 도부장 같으십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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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nths ago
기러기와 가오리 왜 갱도일까? 오다 가오리 감독의 기획전이 연초부터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듯하고, 그의 영화를 주욱 보며 떠올랐던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메이지적 고심과 김영조 감독이 찍었던 태백의 막장이었다. 오다 가오리는 단편 <노이즈가 말하기를>로 자신을 둘러싼 사적 고민의 맥을 짚은 후, 첫 장편 <아라가네> 속의 갱도로 들어간다. 나쓰메 소세키는 대개 부드러운 말씨로 본인의 어조를 정립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이후, 메이지 시대의 중후반을 통과하던 1908년에 <갱부>를 연재하였다. 고뇌하는 상류층 자제-라는 소세키적 청년의 전형이 메이지의 공기(두 이성 사이에서 아무것도 택하지 못한다는 사적 갈등으로 치환된)를 버티지 못하고 지하의 갱부로 일탈하다가 결국 메이지의 공간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인데, 이후 소세키의 소설에서 별세계(소세키 본인의 이력에 빗댄 서방의 문화)를 경험한 메이지 청년의 미래란 요령부득 어두울 수밖에 없으므로 항간에 <갱부>를 두고 떠도는 ‘생의 회복’이란 주제는 영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겠다. 김영조 감독은 첫 장편 다큐멘터리 <가족초상화>를 거쳐 아버지의 행방이라는 자기 기원적 이야기를 구석에 빚어둔 이후 강원도 태백의 막장으로 들어간다. 2008년 만들어진 <태백, 잉걸의 땅>이다. <아라가네>의 거리감보다 더 가깝게 갱부들에게 밀착하여 먼지를 뒤집어쓴 카메라가 소음과 어둠에 잡아먹히나 영화는 별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감독 본인과 당시 영화제 등에선 이를 두고 사회적 병폐를 포착한 객관적 시선이란 설명을 덧붙이곤 했는데 글쎄, 이것은 차라리 <가족초상화>로 본 사적 기원의 최종적 이미지를 갱도로 겹치거나 혹은 갱도 안에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소망으로 드러난 주관성의 전이에 가깝다고 느껴왔다. 여하간 오다 가오리 역시 나쓰메 소세키, 김영조와 유사한 맥락에서 자기 기원적 이야기의 그 후로 갱도를 택했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면서, <태백, 잉걸의 땅>과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막장 속 헤드램프의 한 줄기 빛에 매혹당했음을 발견하여 즐거웠다... 하지만 <태백, 잉걸의 땅>은 갱도를 나서는 터널 밖의 마을 풍경을 찍었던 반면 오다 가오리는 다분히 <무용>의 빨랫감을 떠올리게 하는 갱부들의 실내로 영화를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지닌 기원의 이질감-아버지로부터의 질문과, 자기를 향한 질문-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문제에선 눈을 돌릴 수 있으나 자기의 논제에서 완연히 빠져나갈 순 없는 노릇이다. 오다 가오리와 소세키, 메이지의 사람들, 김영조까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거대한 전환기에 놓인 이들이 세상 아닌 갱도로 향했던 마음이란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지. 한편으로 소세키적인 메이지 시대의 갈등을 도요타 시로 감독의 <기러기>(1953)에서 마주하며 또 다른 흥미가 동했는데, 서구를 향해 간 메이지의 먹물 청년들을 다소 직관적으로 철새에 빗대는 설정보다 눈길을 끈 쪽은 약 3달 동안 흠뻑 빠져 지냈던 다카미네 히데코의 객체적 캐릭터였다. 기러기들이 오가는 기항지에 머물러야 하는 이의 시선과 보폭이 어때야 하는지의 문제를 인식했을 때 지금 나의 상황은 차라리 파리한 다카미네 히데코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들 여기로 가고 저기로 가는 와중에, 선생님 저는 이런 생활을 계속해도 되는 것인가요? 아무튼 <기러기>를 보며 감탄하고 아, 제5의 일본 고전감독 목록에 오를 것은 야마나카 사다오도 아니고 시미즈 히로시도 아니고 기노시타 게이스케도 아니고 도요타 시로인가? 싶은 호들갑에 그의 다른 작품을 보았더니 적잖이 실망했고... <기러기>는 다카미네 히데코가 일으킨 기적일 가능성이 크겠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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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nths ago
와이즈먼과 이스트우드 1930년생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간밤에 작고했다. 두 개의 생각이 스치는데, 하나는 지난 9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시작한 그의 전작전을 기념하여 <씨네21>에 특집 기사를 마련했던 일이고, 또 하나는 그와 동년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생사 문제이다. 다큐멘터리스트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만든 몇 없는 픽션이자 말년의 걸작인 <부부>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사랑이 탈선이고 허구”임을 말하는데 와이즈먼의 영화 만들기 역시 이 사랑의 방식과 무척 유사했다. -라는 점을 특집 기사의 구성을 배열하고 몇 개의 기사를 쓰며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군인과 법의학자의 경로를 밟아온 그는 엄격한 자기 규칙하에서 명확한 일관성으로 영화 만들기를 대하는 동시에 그러한 본인의 규칙에서 탈선하는 유희를 즐겨온 겜블러였다. 모든 촬영본을 복기하며 그것마다 3개 만점의 별점을 매기는 정량화 작업을 기반으로 두고, 내처 최종 선택한 모든 시퀀스의 관계도를 그리지 못함을 불허했던 그에게 한편으로 영화의 편집이란 “영화뿐 아니라 내 삶의 다른 측면들까지도 새롭게 바라보고, 파괴하도록” 만드는 픽션의 과정이기도 했다. 최초의 추상적 아이디어를 주판에 올린 뒤 항시 운과 본능이 주도하는 무질서로 끌고 가야 만족할 줄 아는 게임의 창조자이자 플레이어였던 셈이다. 그의 고유한 게임이 이제 강제 종료되었다는 사실이 꽤 슬프다. 근래 이스트우드의 연출 필모그래피를 빠짐없이 복기하고 그의 평전을 읽으며 참 흥미로운 바는 그가 생각보다 아주 세속적이고 옹졸한 남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흥행을 중시하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아카데미의 선택에 매번 울고 웃는 소인배다. 언뜻 보기엔 무척 세심해 보이나 실제론 무척 강인하고 터프한 성정의 소유자였던 와이즈먼과는 정반대의 모양새다. 태생적 강심장이었던 겜블러 와이즈먼과 반대로, 이스트우드는 최대한으로 자기 세계의 테두리를 지키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고 싶어 했던 내향적 너드인 것이다. 재즈 음악가를 꿈꿨던 소년 이스트우드의 이 소심함과 부드러움은 그의 1980년대 작품들에 가장 깊게 배어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특기할 만한 목록은 1980년의 <Bronco Billy>와 1982년의 <Honkytonk Man>이다. <Bronco Billy>에서 그는 서부극 쇼 유랑극단의 리더로 등장하여 본인이 30대 넘어서까지 황야라고는 구경도 못 했던 도시의 신발 장수였음을 고백하고, 영화의 끝에선 객석에 앉은 아이들에게 “아침 꼬박꼬박 챙겨 먹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어라.”라는 착한 어른의 흉내를 내질 않나 <Honkytonk Man>에선 조카를 연기한 아들 카일 이스트우드에게 자기 세계의 유지를 물려주는 컨트리 뮤지션으로 분하여 숭고하게 떠난다. 이외에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의 유약한 보호 심리(그의 열렬한 반대자였던 폴린 카엘은 이를 두고 현대적 마초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귀류법이라고 비판했다)와 비겁한 변장술은 서부극뿐 아니라 <The Eiger Sanction>, <Firefox> 등 흥행을 위해 만들어졌던 그의 007식 첩보물에서 무척 짙은 색을 띠며, 1990년의 <White Hunter Black Heart>에서 끝내 순수한 고백으로까지 나아간다. 여하간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 전체에 관해 더 긴 호흡으로 쓸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생각하던 찰나, 와이즈먼의 부고 소식을 접했고, 만약 이스트우드를 쓰게 된다면 결국 그가 떠나고 나서일 수밖에 없겠나-라는 모순된 감상에 매번 빠져들기도 하면서, 두 동갑내기 감독의 죽음과 점차 다가오는 이별에 (미리) 명복을 빈다는 구정의 이상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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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마른 잎>과 40/100 마른 잎은 대개 강한 예감을 추동하는 오브제다. 곧 저 잎이 바스러져 먼지가 될 것이라는 촉지적 상상, 혹은 직접 저 잎을 발로 짓이겨 바사삭 부술 것이란 적극적 개입이 수반되는 이미지이고 <마른 잎> 역시 그 제목처럼 관객의 상상과 개입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영화를 이어간다. 초반에 등장하는 마른 잎은 결국 조각나지 않은 채 (아주 의도적인) 바람에 날아가 버리며 보는 이의 예감을 뭉개고, 물가의 젖은 잎은 지반에 떡하니 달라붙어 별다른 움직임의 재미를 부르지 않으며 마른 잎에의 애정 섞인 그리움을 주장한다. 예감이라는 주된 모티프는 SD 화질보다 못한 화면의 저열함과도 조응하는데, 먼저 말하자면 <마른 잎>은 표정이 아닌 고개의 영화다. 보는 이들은 인물의 구체적인 표정이나 시선 교환을 목격하기보다 그저 그들의 고개와 몸, 손이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지 그 전반의 형상을 감지하게 된다. 내처 그 형상들은 숏과 숏을 연결하는 데쿠파주의 수단이 되기보단 한 숏 내부의 긴장감을, 한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내적 몽타주의 이행을 예감하게 만들고 영화는 매번 그 예감을 빗나가게 하며 보는 이와의 줄다리기를 이어간다. 20대 후반의 딸이 짧은 편지만을 남기고 집을 떠나자, 아버지는 딸이 있을 법한 전국의 축구장을 찾아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한 청년과 길을 함께 하는데, 청년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소리의 유령으로 등장하여 화면 내 요소 간의 시각적 연결을 돕지 않고 미래를 계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는 풀밭에 누워 있는 소년, 소녀의 몸을 각각 3등분하여 클로즈업으로 분절함으로써 그들의 몸 전체가 롱숏에 드러나기 전까진 함부로 그 정체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표정의 좌표를 잃은 인간들의 몸짓은 소, 개, 당나귀 등 동물과의 움직임적 차이를 없애며 때로는 아버지와 청년이 타고 가는 자동차의 궤적이 인간의 움직임에 동화되면서 영화는 부분의 의미보단 총체의 상을 그리는 일에 집중하는 로드 무비로서 종합된다. 마지막에 읽히는 누군가의 편지가 일러 주듯이, 아버지는 딸이 방문한 모든 축구장을 거의 다 추적했으나 포획엔 실패했으며 그 이유는 세계의 조각들에 사후적인 의미가 덧대어지지 않는 이상 오브제는 오브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이 <마른 잎>의 이미지를 인상주의 회화와 비교하는데, 두 매체의 지향은 판이하다. 인상주의가 보는 이의 눈에 기록된 이미지를 캔버스에 덧대어 현시하는 일이라면, <마른 잎>의 영화론은 되려 기록을 없애고 휘발되어 단발적 흥미만을 일으키는 숏(들)의 제시에 몰두한다. 고흐의 구두에서 몇 개의 픽셀을 골라 무작위로 흩트리는 일이고, <햇빛 속의 모과나무>가 보여준 것처럼 극한의 서사적 리얼리즘이 어떻게 철저한 형식에 가닿을 수밖에 없는지 되새기는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시간에 기반하여 의미를 만드는 인상주의 회화와 달리, <마른 잎>은 시간의 의의를 무력화하고 공간과 동세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암운과 안개가 화면을 가리거나 외려 더러운 것이 렌즈를 삼킬 때 관객은 공간의 쾌청함을 느낀다. 가장 단순한 감명을 자아내는 동세가 2부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술한 풀밭 위의 소년, 소녀의 부탁에 따라 아버지가 무너진 축구 골대의 기둥을 땅에 세우는 장면에 새겨져 있다. 두 아이와 아버지가 아름드리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무의미했던 축구장에 손때를 묻혀 본디의 공간에 그들의 새 시간을 각인하는 일은 <마른 잎>이 고집스러운 공간의 유희에서도 결국 포기하지 못한 어둠과 습기의 정취를 만끽하게 하며 이때 영화가 끝났다면 더욱이 아름다웠겠다는 번뜩임마저 일으킨다. 이외에도 <마른 잎>의 유희는 탐정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르적 궤도,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거론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길과 아이, 노인의 존재, 파운드 푸티지의 감각에 기반한 디지털 시대 시네필의 모호한 이미지에의 매혹 등을 건드리다가 매번 무시하며 즐겁게 나아가는데, 2부 중반에 이르러 캐릭터적 감상에 맞춰 쉬이 정제되는 숏의 쓰임은 다소간의 아쉬움도 부르는 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론 근래 다카미네 히데코의 영화를 찾아보며 본 나루세 미키오의 초기 유성 영화 <버스차장 히데코>의 짓이겨진 화질에서도 큰 감응을 일으킨 그녀의 제스처와 <마른 잎>의 여러 순간이 겹치며 아주 즐거웠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숏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한... 6주 간 영화 100편 보기로 마음먹었는데 14일만의 40편째다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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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onths ago
진부한 이야기들 <아바타: 불과 재>를 두고, 혹은 <아바타> 시리즈를 두고 서사의 진부함을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부한 재료들로 제임스 캐머런이 얼마나 환상적인 플롯을 만들었는지 잘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지금이 극장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장대한 이야기의 길이와 갈래를 차곡차곡 쌓고 끼워 넣어 가는 사가의 감각을 극장 영화가 다른 서사 매체들에 넘겨준 지 오래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이...), 형식이란 말은 지나치게 반-서사적인 것으로 여겨져 이야기와 형식이 하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논의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형식, 매해 찾아오는 <씨네21> 올해의 영화 결산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와 기타노 다케시의 <브로큰 레이지>를 1, 2위로 뽑은 이유도 이 노장들은 여전히 이야기와 형식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파고드는 (영원한 동시대적) 영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시각화할지 혹은 그저 무엇을 새롭게 보여줄지 (PTA처럼) 고민하지만, 작가는 말하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관계를 외따로 생각하지 않고 각 재료의 진부함이나 신선함 따위를 고려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총체성을 느끼도록 만든다. 한국영화에서 <구름이하는말>과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를 1, 2위로 선정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만약 개봉작 외에 뽑을 수 있었다면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이 1위였을 이유도 같다.. 하여 금주에 쓰게 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는 이 진부한 이야기의 재료를 정말 진부한 외적 재현으로... 일종의 캐리커처처럼 실존 인물들을 시각화하며 서사를 극도로 평탄화하는 한편 시간을 다루는 형식적 태도에 집요하게 몰두하여 균형을 맞췄으니... 역시 역시 링클레이터는 정말 훌륭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던... <슈퍼 해피 포에버>를 보면서도 역시 역시 이가라시 고헤이는... <주토피아2>를 보면서도 디즈니-픽사는 역시 역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이이다가 말하는 “내 행동은 내 꿈의 형태다”라는 대사를 들으며 역시 역시 현자들의 언어는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어쩌구... 이런 생각을 쓰기는 좀 그래서 <아바타: 불과 재>의 기사는 진부하게 그려졌다.., 여하간 몇천 년 동안 사람들이 만드는 이야기엔 별 차이가 없고... 대개 껍데기만 달라지며 유의미하게 이어진다. 사람살이도... 이제 간신히 몇 년 지낸 기자 생활도... 전주, 부천, DMZ, 부산, 부독제, 서독제 등을 거치고 연말 결산을 고민하다 보면 매 1년이 또 끝남을 체감 중이고... 매해 이맘때엔 모임 별의 <올해 연말>을 듣고... 겨울마다 무조건 걸리는 감기를 피하려 아무리 애썼으나 결국 조카 태양이에게 옮아 버려서 행복하고... 그나마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몇 년 동안엔 해가 넘어가는 시각에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자그마한 의식을 치렀으나 올해부턴 아예 안 봤던 감독의 영화를 볼지 싶은 의지 정도인 듯한데 아무튼 30살이라 혼란스럽다는... 진부하다 진부해 에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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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onths ago
근래 영화 화제의 개봉ㆍ공개작들을 여차저차 차근차근 따라잡는 중이지만... 즐겁게 본 작품이 없다는 슬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프랑켄슈타인>은 드뇌 빌뇌브의 <듄> 시리즈처럼 연출자의 약점이 여실히 부각되는 영화들이었다. 오쓰카 에이지의 표현처럼 문학적인 스토리성 즉, 사가(saga)를 꾸리는 일에 그다지 특기가 없는 현재적 이미지와 동선의 작가들이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은 옷을 입고들 나타났다. PTA와 기예르모 델 토로는 데이비드 린이나 윌리엄 와일러보단 로버트 알드리치와 자크 투르뇌르에 가까운 이들인데... <부고니아> 역시 그 어떤 심리적 장악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평면을 기어코 입체로 다루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단점만 눈에 보인다. 올해의 할리우드는 슬프다 한국영화도 비슷했다. 기대했던 <굿뉴스>와 <세계의 주인>은 분명 좋은 흡인력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방면에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섬세한 나머지 연출자의 행간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특히 <세계의 주인>은 스크린을 조이는 듯한 연출의 전방위적 압력이 도리어 영화적 서스펜스의 쾌를 반감하는 쪽으로 흘러 아쉽다. <극장의 시간>에 포함된 감독의 단편 <자연스럽게>와 비교하면 더더욱. <퍼스트 라이드>는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다가 연출자의 장점이 희석된 사례이나 그래도 시대의 조각을 어딘가에 담았다는 점에 애정이 갔고 이에 관해선 이번 달 <한국영화> 웹진에... 아무튼 <씨네21>의 1995-2024 베스트 리스트와 영상자료원의 사사로운리스트 등이 발표됐고, 곧 <씨네21> 연말 결산도 앞둔 시점에서 이런저런 나름의 고민과... 올해 적어도 600편의 단편영화와 100편 내외의 장편영화를 봤을 텐데 뇌에 뭐가 남았는지와 최근 유의하게 썼다고 기억나는 글은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뿐이라는 게... 이렇게나마 기록하는 이유 더불어, 다가오는 최고의 기대작이자 대중문화의 변곡점이 될 아니메 <초(超) 가구야 공주>와 그 뒤를 이을 나츠메 신고의 아니메 <ghost>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왠지 영화를 홀대하는 듯한 죄책감이 들다가도... 지난 몇 달 동안 남도 광양과 진주 등 각지에서 만난 영화들이 반가웠고, 오는 부산독립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를 준비하며 감상한 영화들에 대해 곧 제대로 말할 수 있음에 설레는 마음. 올해 부독제와 서독제에서 함께 봐주시면 좋을 작품은 우선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과 단즈카 유이가의 <전망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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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onths ago
전생 같은 9월... 큼직하게는 -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일간지> 제작과 행사들과 새벽의 해운대... 이렇게 저렇게 영화 20편은 봤고 <겨울날들>과 <고양이를 놓아줘>가 기억에... 부산에 2주를 머물렀으나 고향 친구ㆍ선배들을 보진 못했다... - 서울독립영화제 경쟁 단편 심사... 부산영화제와 심사 일정이 겹치며 3주 동안 그저...🥵 즐거운 단편들 곧 겨울의 서독제에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행사들 / <어머니에 대한 추측>이 유독 기억에 - 영자원 행사 <퇴마록> 김동철 감독님과 - 한겨레 비평 수업 첫 기수 끝 /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 3시즌 해왔던 넷플연가 이제 끝 외... 여러 원고와 청탁과 행사들 시간을 내어 극장에서 간신히 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어쩔수가없다> 모두 실망스러웠다.., 아프다.. . 5~8월에도 여러 기억이 있으나 우선 스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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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onths ago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편집위원을 맡아 지난해 겨울 무렵부터 준비한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연재 기획이 이번 주 개편을 맞은 <씨네21>에서 시작했습니다. 21세기의 사반세기, <씨네21> 3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특별 연재입니다. 말 그대로 21세기의 영화가 무엇인지, 21세기 영화가 20세기 영화와 어떻게 연결되고 분리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하는 기획입니다. 20세기의 주류 영화사, 담론을 지금의 시선에서 재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총 6개의 키워드 아래에서 다양한 필자의 24개의 글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20세기의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시작한 연재의 첫 글은 정성일 선생님의 비평, '우리가 잃어버린 숏'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편집위원이자 필자로 함께해 많은 조언을 주신 이도훈 선생님, 김병규 평론가님께 감사드리며... 1년 동안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도 부탁드립니다-! 정진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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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onths ago